세가지 응원
배우자의 응원
글을 쓴다고 하니 남편은 한껏 신이 난 표정이었다. 무얼 쓸 줄 알고 그 사람이 신이 났는지는 알 수 없다. 글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날에는 어디서 주문해서 도착한 노트북 세움대를 설치해 준다. 시선에 맞게 모니터가 있어야 목이 아프지 않단다. 그리고 며칠 뒤에는 90년대 컴퓨터실에 있을법한 모습을 한 반가운 키보드를 노트북에 연결해 주었다. 또 며칠 뒤에는 무선 마우스 중에 크기가 작고 예쁜 모양이라며 준다. 프린터기 줄을 찾아 연결하고 쓰던 5~6년 동안은 신경 쓰지 않더니, 글을 쓴다고 하니 무선으로 설치해 자랑스럽게 일러준다. 도대체 이 남자에게 내가 글을 쓴다는 것이 어떤 의미이길래 이러는 걸까. 평소 수다스러운 나지만, 웬일인지 그 이유를 몇 달이 된 지금까지도 물어보지 않고, 가만히 남편의 즐거움을 방해하지 않는 나도 어느새 그와 닮았다.
8년의 결혼 생활은 상대에 맞춰 조용한 방식으로 응원하게 되었다. 호들갑스러움을 삼가는 그를 응원하는 방식이었다. 결혼 생활의 깊이만큼 서로를 닮아가는 줄 모르고 나의 호들갑스러운 응원을 기대한 남편이 투덜거리는 날도 온다. 나는 덜 부산스러워졌고, 그는 조금 부산스러워졌다. 아이를 재우고 영화를 함께 볼 때 등장인물과 줄거리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를 이어가는 그를 보면서 상대적으로 조용해진 내가 참 재밌다. 신혼 때 영화를 보는 내게 ‘그렇게 말을 계속하며 볼 수도 있는가.’ 의구심 가지며 ‘집중하게 조용히 해달라.’는 그의 대사를 내가 하는 날도 온다. 참 달콤한 복수를 8년 만에 해냈다.
부모님의 응원
부모님과 형제들은 왁자지껄하게 무언가를 미리 축하하고, 잘될 거라고 응원했다. 순서가 뒤바뀐 축하와 큰 응원을 받는 집이었다. 꽃게를 상자째 사 와 엄청나게 큰 솥에 찜을 쪘다. 8인용 식탁에 쪄낸 통통한 꽃게를 그득하게 올려두고 미리 축하하는 날들도 많았다. 각기 잘하는 요리를 준비해서 모여 앉아 나눠 먹는 파티가 하루 종일 계속되기도 했다. 기다림은 오롯이 긴장의 연속이라지만, 가끔은 그렇게 서로를 왁자지껄하게 응원했다. 결과가 좋지 않았던 날도 통통한 꽃게를 미리 배불리 먹어서였을까? 다시 하면 된다는 긍정적인 마음이 언제나 자리매김했다.
‘결과가 그게 아니면 어떻게 해?’ 미리 축배를 거하게 드는 집으로 장가온 남편은 몇 년간 우리 집의 사고방식을 따라가지 못해 힘들어했다. ‘자기 본가로 가면 스피커 5대가 가까이 와서 각기 다른 이야기를 동시에 하는데, 어디를 보고 어떤 표정으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어….’ 친정집 가족은 이야기를 듣다 자기와 중첩된 이야기가 나오면 바로 자신이 화두가 되는 영어권 국가의 언어 습관과 닮은 부분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영어권 친구들과 이야기할 때, 내 할 말을 하고 빠지는 ‘밀물 썰물의 대화법(본인지음)’에 익숙했다. (한국분들이 영어 구사를 잘함에도 불구하고 언제 이야기를 치고 나가야 할지 고민이 된다는 말씀을 실제로 강의에서 들은 적 있다.)
나와 부모님은 좋은 것을 꿈꾸고 말하면 그것이 이뤄진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미리 축배를 드는 것에 의문점을 ‘시크릿’ 책과 연결 지어 남편은 마침내 이해한 듯하다. 내 부모님을 만나러 갈 때면 많은 스피커 사이에서 초점을 두는 방법도 터득했다. 자신과 중첩된 이야기가 나오면 잠자코 듣지 않고 이제는 제법 끼어들며 이야기도 하게 되었다. 어느새 그는 좋은 미래를 상상해 나가는 이야기를 자주 하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결과를 기다리는 속에서도 부정의 말보다는 긍정의 언어를 구사하며 마음 졸이지 않게 된 듯하다. 긍정의 미래확언 선구자인 부모님과 후발대의 남편도 나에게서 심어주지 못한 한가지가 있었다. 그걸 해낸 사람은 나의 4세 아들이다.
아들의 응원
나의 얼굴 톤에 비교적 가장 잘 맞았던 차분한 진주 귀걸이를 하고 영어강연과 강의를 하러 갈 때면, 늘 자신감이 생겼다. 호감 가는 외모의 경쟁력과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나에게 오늘도 아들은 응원을 아끼지 않는다. ‘엄마 귀걸이 했어?’ ‘엄마 운동했어?’ ‘엄마가 결혼사진처럼 날씬해지면 더 잘 어울릴 것 같아.’ 만4세아들이 나의 운동을 관리하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나는 나의 몸매를 사랑해 왔다. 서구화 적 식습관을 비롯해 나쁜 식습관까지 가리지 않았고 운동을 하지 않고 낮잠을 즐기는 게으름의 방증은 나의 몸매가 대신 말해준다. 그래도 어떠리 나는 행복한 사람이었다.
4세 아이의 눈은 정확했다. 아이는 내가 날씬했을 때의 사진을 바라보며 엄마의 모습이 그때로 돌아가기만을 간절히 바란다고 했다. 배를 눌러보며 ‘오늘은 뱃살이 좀 들어갔으려나.’ 하는 아이에게 아무런 저항을 할 수가 없다. 아비가 상금을 크게 걸어도 동요치 않았던 행복한 몸이었는데 요즘은 마음이 불편하다. 아들이 매일 하는 질문에 웃으며 ’오늘도 운동하고 왔어! ‘라고 답하는 날에는 아이 눈이 밝게 빛이 난다. 미래에 날씬한 사진 속 엄마가 되어 하원 할 때 온다면 하는 소망이 담긴 눈이다. ‘내 그것 하나 못 들어 주리.’ 하면서 작년부터 시작해 총 9킬로를 감량했다. 중간 슬럼프로 잠시 주춤하였지만, 최근에 부쩍 운동 이야기를 하는 아들의 말에 다시 나를 움직여 본다. 누군가가 나를 운동 시키며 살을 빼게 만드는 건 참으로 처음이라 참 대단한 아이가 아닌가 싶다. 아이는 엄마에게 맞게 온다는 말이 괜한 말이 아닌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