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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켈리류 Jun 04. 2024

이은새 <밤의 괴물들>, 2018

밤의 도토리


이은새 작가의 <밤의 괴물들, 2018>


밤의 도토리


Think about the powerful energy that is condensed into an acron. If you bury it in the ground, it will grow to a giant oak tree.

한 알의 도토리 속에 응축된 강력한 에너지를 생각해 보라. 땅속에 묻으면 거대한 떡갈나무로 성장해 오른다.
_George Bernard Shaw 아일랜드 극작가, 소설가, 비평가


도토리 속에 응축된 강력한 에너지, 그 시간은 육아를 시작한 몇 년간 밤의 시간이었다. 그 에너지는 축적되어 현재의 커가는 나의 떡갈나무를 이루고 있다.


영어라는 언어를 배워 가르치게 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갈고닦은 시간은 나에게 도토리 한 알(an acron)의 시간이다. 한 알의 그 도토리 에너지를 지키기 위해 배우고 가르침을 지속해 나가기 위해 아이를 품고 배 뭉침을 이겨내며 막달까지 대학 강의를 계속하였다.

친구들로부터 축하받은 파티 Baby Shower
대학교 영어강의 사진들

아이가 태어나 10개월 동안 신생아 육아와 코로나 창궐 공포의 시기로 강단에 설 수 없었지만, 아이가 11개월이 되어 나의 생일이던 날부터 비대면 화상 대학 강의를 이어 나갔다. KF94 마스크를 쓰고 회사에서 숨 한번 편하게 쉬지 못했던 초보 아빠인 남편은 일을 절대 놓을 수 없어 하던 부인을 지지해 주며 120분의 두 강의 시간을 확보해 주었다. 그 시절의 남편은 나의 도토리를 지탱해 주는 뿌리요, 가지요, 그늘이 되어준 나뭇잎이었다.



밤에 눈 뜨는 도토리


모두가 잠든 새벽의 시간에 중독되면 낮의 여유를 즐기지 못한다. 밤에 자주 깨어있는 중독된 시간은 뇌의 찌꺼기를 제거하는 청소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여, 뇌에 쌓인 불필요한 물질들을 배출하지 못한다. 


2010년대 새로운 뇌의 기능이 발견되었다. ‘Glymphatic System; 글림프 시스템’ 비렘수면(Non-REM sleep)을 하는 동안 우리 뇌는 노폐물을 배출한다. 앤서니 코마로프 교수는 나이가 들면 혈관 외벽 수로가 줄어들게 되어 노폐물이 나가는 길이 줄어들면서 기능도 저하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나는 몇 년간 뇌의 찌꺼기를 제거할 절호의 기회였던 잠을 줄여 여러 언어의 배움의 끈을 놓지 않았으며 영어 강의자료를 다듬고 만들며 내 도토리를 지켜나갔다.


65페이지의 2시간 영어 강연을 마치고 질의 시간에 늘 여쭤보시는 질문이 있다. “아이가 어린데 어떻게 놓지 않고 해내신 걸까요?”라는 질문이었다. 나의 공손한 대답은 언제나 같다. 밤에 눈뜨는 도토리의 시간이다.

광교홍재도서관 <영어, 행복하게 만나다.>
한림도서관 <여러 언어를 하는 영어전문가의 육아>


가끔 운이 좋다면 아이를 재우다 잠들어 이른 새벽에 일어나 나의 시간을 즐기는 것이었지만 웬만해서는 불안함에 잠이 들기 어려워 밤에 눈을 뜨고 새벽을 맞이하는 밤의 시간을 사랑해 왔다.



새벽이 되어 잠드는 도토리


육아가 끝나고 시작되는 나의 도토리 시간은 책을 읽으며 부분 필사를 하기도 하고, 영어 외의 가장 가까이하는 일본어를 잊지 않기 위하여 에쿠니 가오리 소설원서를 보며 단어 정리를 시작한다. 잊어버린 한자를 획을 그어 찾아보고, 한자를 히라가나(ひらがな)로 읽어나가는 음인 요미가나(読みがな)를 다시 적어 보는 두 번의 과정을 거쳐 완성되는 일본어를 볼 때면, 바로 읽어져 나가지는 영어, 한국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가 조금 더 단순한 단어집이 아닐까 위로받기도 한다.

에쿠니 가오리 <호텔 선인장>

어느 언어든 접근의 문턱이 낮았다 할지라도 더 깊숙하게 들어가려 하면 매우 어려우며, 언어학습을 위해 반복하는 과정을 하루 속 나의 일상으로 습관화하는 것이 언어를 내 것으로 소지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임을 여러 언어 속에서 배웠으며 지금도 고군분투 중이다.


한국, 일본, 중국, 3국의 생김새는 같은 동양권으로 매우 닮아 서로를 구별하기 어려울 때가 많지만 내재한 사고방식, 특색, 언어구성을 볼 때 상당히 다르다는 점이 배워나가는 과정에서 확연히 나타난다. 한국인이 한국어를 기반으로 다른 언어를 배우면서 가장 가져야 하는 사고는 바로 그 나라 사람이 되어 보는 것이다. 대표되는 방법은 그 나라의 영화나 드라마, 책을 보는 것이다. 책은 문어체로 이루어진 경우가 많으므로 구어체로 이루어진 영화나 드라마가 더 도움이 되는 것은 맞으나, 결국 언어의 배움의 끝에는 늘 아날로그 방식인 책으로 공부하는 것을 추가하지 않으면 언어를 정리하는 힘을 기를 수 없다.


개인의 시간을 들이지 않으면 금세 날아가 버리는 ‘큰 날개’를 갖고 있는 언어는 직업으로 갖고 있기에 가끔 버겁다. 물론 다른 직업을 상세히 모르는 내가 해보는 칭얼거림으로 귀엽게 봐줘도 좋다. 하지만 오래 쉬어 감을 잃어버리는 불상사를 늘 삼가야 하고, 잦은 돌봄이 없이는 금방 불씨가 꺼져 연기를 내뿜는다. 연기가 되어버린 불씨를 다시 살리려면 재빨리 불씨를 키워주는 낙엽이나 솔방울을 준비해 둔다면 좋지만, 낙엽과 솔방울의 화력 시간은 그리 길지 못해 한두 개 가지고는 어림없다. 주말집이 되는 작은 캠핑카의 밴라이프 (Vanlife ; 차에서 먹고 자는 삶)에서 배운 것은 화력의 지속성이다. 결국 오랜 시간 수분을 날리고 잘 말린 장작은 장시간의 화력을 보여주지만, 불씨를 살리는 데는 유용하나 짧은 지속성의 시간을 가진 낙엽과 솔방울들은 잘 말린 장작 하나의 힘을 결코 이기지 못한다.


새벽 시계가 3시 30분을 가리킬 때면, 나는 오늘도 나의 도토리를 지켰노라 안도하며 긴 숨을 내뱉는다. 뇌의 찌꺼기를 배출해 내는 시간을 가지기 위해 밤의 도토리 시간은 앞으로 많이 사라질 테지만, 낮의 도토리 시간을 위해 또다시 나를 바꿔 보는 앞으로의 나를 잘 말린 장작을 들고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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