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청록색을 좋아하지 않는다. 펠릭스 발로통의 이 화폭의 청록과 어두움이 짙어 내리기 시작한 시간의 변환은 어릴 때 보았던 공포 영화 중 한 장면이 기억나 괴롭다. 녹이 쓴 무언가를 바라볼 때 마음의 스산함과 찌릿한 비명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기분은 서늘함이다. 가슴에 얇고 긴 바늘이 죽이지는 못하고 스산한 소리를 내면서 통과하는 서늘한 기분이다. 혼자서는 밤운전을 절대적으로 하지 않는다. 운전도 잘하지 못하거니와 검은색과 청록색 불빛이 무언가 나에게 공포를 자아내기 때문이다. 청록색에 대한 공포였을까 어떤 이들도 외계인을 청록색으로 그린 사람들은 왠지 그 마음으로 색감을 쓴 것 같다.
보라색을 좋아하지만 이 그림에서 만큼은 왜 이리도 매력적인 색감으로 보이지 않는가.. 보색대비? 음영의 조화 너무 정중앙에서 나를 노려보는 듯한 태양의 시선. 그리고 두려워하는 밤의 숲 속 어딘가에서 관망하는 듯한 관점이 모두 불편하다.
분명 작가의 입장에서는 아름다움을 화폭에 담았을 것인데, 오렌지와 보랏빛의 하늘, 그레이스의 노을이라는 제목에서부터 이런 관람자가 생긴 것을 기뻐하지 않을 텐데.. 배려심 있게 이 그림은 아름답노라 하면 될 텐데 자꾸만 글은 나의 불편한 마음을 줄줄이 늘어놓고 만다.
녹조현상이 생긴 어느 강인지 바다인지 기억 안나는 곳을 어릴 때 보고 자연의 아픔을 공포감으로 연결 지어 바라보게 된 것도 녹이 슬어 버린 쇠를 영화에 넣어 강을 타고 내려가던 공포스러운 시체의 모습인지 마스크였던 건지를 바라보는 나무 바닥에 눈을 대고 보던 공포영화의 주인공들의 장면이 아직 내 머릿속에 코어 기억으로 자리 잡아 있다. 그 뒤로는 사고 난 어떠한 곳의 장면도 인간의 원초적 호기심으로 보는 것을 절대적으로 거부하게 되었다. 사진과 같이 출력되어 남은 그날의 기억이 나를 그렇게 눈감게 하였다.
물 흐르듯 살아내
어떤 일을 겪으면서 인간은 각각 다른 선택으로 삶을 대한다. 한 지인의 자기소개 글귀에는 ‘어떤 일이던 받아들이기 나름이다. 크게 보면 크게 행동하고 작게 보면 작게 지나간다.’ 오랫동안 작은 일에 목숨을 걸며 혼자만의 싸움을 계속해 나가던 나 자신에게 그 이야기는 진정한 어른이 말씀해 주시는 한마디 같았다. 크게 보면 크게 행동하고 작게 보면 작게 지나간다는 말과 흡사한 말은 작년에 이곳에 올라와서 만나게 된 상하이 사업가 언니로부터도 듣게 되었다.
한국어가 굉장히 유창했지만 어떤 특정한 어톤에서 나는 외국 사람이란 걸 감지하고 실례가 되지 않는 다면 어느 나라에서 오셨는지 여쭤보았다. 상하이 인 3세셨다. 집에서는 한국어를 배우게 하셔서 나라의 근간을 잊지 말라는 가르침을 어릴 때부터 배우셨다 하셨다. 일본과 사업도 오랜 기간 하시는 중이라 일본어도 능통하셨는데, 어쩌다 그 자리에 서서 일본어로 대화가 한참 서로 오갔다. 제3세계 내 고향사람을 만난 것 같은 마음으로 나 또한 한동안 배웠던 중국어를 그분과 하였다. ‘발음이 참 좋네요. 우리 자주 만나서 일본어로도 중국어로도 한국어로도 대화하지 않을래요?’
몇 번의 만남은 3시간이고 4시간이고 각자 살아온 생각과 책, 해외 경험을 일본어 중국어 한국어 때로는 영어로 나누었다. 책의 취향도 너무 비슷해서 한 책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시간.. 다국어를 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그 나라 언어를 쓸 때 그 나라의 문화를 흡수하고 사랑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좋아해야 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며, 끝까지 가게 되는 나의 생각을 상하이 사업가 언니도 동의했다. 두보의 시를 중국어로 아름답게 읊어 줄 누군가가 나에게 나타난 것이다.
점심을 먹으며 당시 고민을 이야기하다 나온 이야기에서 그분은 이 한마디를 밥솥이 더 나은 맛의 밥을 해주듯 해 주셨다. ‘켈리, 물 흐르듯 살아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