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무료할 때 지구 한 바퀴
‘너 국제 납치당하는 거 아니야?’
내가 일면식도 없는, 어느 한 인스타그램 팔로워의 말만 듣고 세계 일주를 떠난다고 했을 때 주변인들이 장난스럽게 반응했다. 그냥 세계 일주도 아니고 크루즈를 타고 장장 105일에 걸쳐 지구 한 바퀴를 여정이었기에 걱정의 시선도 있었다. 제주도 여행도 최소 한 달 전에 계획하는 사람이 뭐에 홀렸는지, 이 모든 결정과 준비, 그리고 실행까지 단 2주밖에 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장 2주 뒤에 출항인 이 여정에 대해 고민을 한 지 3일째 마음을 결정하고 부랴부랴 출국을 준비했다.
이 모든 게 빠르게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은 1) 다행히 비자 발급이 딱히 필요 없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점, 2) 아직 기약 없는 백수 신세라는 것, 3) 책임져야 할 가정이 없고 계획도 없는 싱글이라는 것, 그리고 4) 이 세계일주 크루즈를 0원으로 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이유가 주변인들이 걱정하는 지점이었다. 맞다. 세상에 공짜가 어딨나. 당연한 걱정이었다. 하지만 이 ‘0원 탑승’에 조건이 있었다. 바로 크루즈에서 통역가로서 자원봉사를 해야 하는 것이다. 이 크루즈에 대해 알려준 인스타그램 친구도 통역가로 이 크루즈를 탔었다고 한다. 들어보니 업무강도가 그렇게 세지 않았다. 무엇보다, 일반 승객으로 타려면 최소 2~3천만 원이라는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데 내가 어디 가서 3개월 반 동안 일한다고 그 큰돈을 벌 수 있겠나. 계산기를 두드려보지 않아도 이건 나에게 무조건 이익인 셈이었다. 기회라고 생각했다. 백수 5개월 차, 해보고 싶은 것은 웬만큼 다 해서 하루하루가 슬슬 무료해질 때쯤이었다.
이 크루즈가 어쩌면 내 인생의 기회일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은 ‘0원 탑승’도 세계일주도 아닌, 이 크루즈의 정체성 때문이었다. 나는 이전에 미국에서 유학하던 시절, 하와이와 마이애미에서 총 두 번의 크루즈로 여행한 경험이 있다. ‘크루즈 여행’하면 흔히들 떠올리는 휴양의 끝판왕을 선사한 여행들이었다. 이전 크루즈 여행들은 놀고, 먹고, 마시고, 딱 돈 쓰기 좋게 만들어진 여행이라면 이번 크루즈는 여행은 단순히 수단에 불과하다. 이 크루즈는 세계를 돌아다니며 평화를 도모하고자 하는 큰 미션이 있었다.
크루즈 이름마저도 Peace Boat(이하 피스보트; 뜻: 평화의 배)이다. 2017년에 노벨 평화상까지 받은 이 크루즈는 국제 NGO이다. 그래서 선상에서 진행되는 이벤트도 그 정체성을 잘 반영하는 것들로 계획된다. 전 세계적으로 각 분야에서 평화에 기여하는 사람, 평화 구축을 위해 풀어야 할 여러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강연자로 초청된다고 했다. 바로 이게 내가 이 크루즈를 타야겠다고 마음먹은 결정적 이유였다. 강연자들 그리고 크루즈 목적과 뜻이 같은 사람들과 밀접하게 교류하며 세상에 대해 배울 기회, 백수도 오래 하고 볼 일이었다. 진로 고민을 하며 아직까지 속 시원한 해답을 찾지 못해 답답한 나에게 무언가 알려줄 수 있을 것만 같은 절호의 기회처럼 느껴졌다. 퇴직금은 진작에 다 쓰고 없었지만, 적금 몇 개 깨서 관광도 할 수 있는 자금까지 확보했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나의 첫 세계 일주가 될 것이라고 직감했다.
내 인생이 가장 무료할 때 찾아온 특별한 기회. 다행히 납치되지 않고 한국에 잘 돌아와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이 글을 쓰고자 하는 목적은 얼마나 많은 나라를 방문하고 인스타그래머블한 사진들을 건졌는지 숫자로 이 경험을 기억하는 관광객(tourist)이 되지 않기 위함이다. 단순한 관광이 아닌, 이번 여행을 통해 얻은 수치화할 수 없는 새로운 경험과 지식을 가슴에 고이 새겨 온 여행자(traveler)가 되기 위함이다. 여행은 물리적 이동이 아닌, 마음과 영혼이 함께하는 여정이라 믿는다. 독특한 크루즈와 더 독특한 그 승객들과 함께 한 여정이 선사한 깊은 감동과 인사이트를 나누고자 하는 마음을 담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