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무료할 때 지구 한 바퀴 (2)
이력서를 제출한 당일, 바로 그다음 날 면접 일정이 잡혔다.
남미와 아프리카를 도는 크루즈는 12월에 출항 예정이라 여유롭게 여행 준비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면접 때 피스보트 관계자가 말한다. 당장 2주 뒤 출항하는 크루즈에 한국어-영어 통역가가 한 명 밖에 모집되지 않아 한 명이라도 급히 필요한데 혹시 8월에 함께 해줄 수 있냐고 묻는다.
갑작스러운 제안에 고민이 됐다. 세계일주와 아프리카 대륙 여행은 내 버킷리스트였다. 게다가 이건 일타쌍피의 기회. 하지만 준비할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2주 만에 3개월이 넘는 해외여행 준비를 한다고 생각하니 벌써 아찔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12월 크루즈 여행은 여유롭게 준비할 순 있어도 그만큼 백수 생활이 늘어나는 것이지 않나. 경력 공백도 걱정되고 내 퇴직금이 그때까지 과연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또 그 사이에 내가 혹시라도 마음에 드는 회사라도 발견해서 취직이라도 하다간 크루즈에 영영 타지 못할 수도 있다.
이 기회를 놓칠 순 없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기 위해 무리하는 것보다는 하나라도 확실히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준비 과정이 쉽지 않더라도 당장 2주 뒤 출항하는 크루즈에 탑승하기로 마음먹었다. 예상한 대로 갑작스러운 출국 준비는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고된 작업이었다. 하지만 2주 뒤, 나는 세계일주하는 크루즈, 피스보트에 성공적으로 처음 발을 딛게 됐다.
탑승 후에 알게 된 사실은 내가 다른 자원봉사자들은 다른 채용 과정을 거쳐 선정됐다는 것이다. 이력서만 제출한 나와 달리 다른 지원자들은 출항 무려 3달 전에 통역하고자 하는 2개의 언어로 자기소개 글을 써서 제출했다고 한다. 선정된 후 크루즈 탑승까지 2달 동안, 매주 피스보트와 통역 자원봉사에 대한 교육도 받았다고. 출항 2주 전에는 모든 자원봉사자와 관계자들이 크루즈에 미리 탑승해 선내 생활에 적응할 겸 일종의 합숙 훈련을 했다. 정말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과정이었다. 반면, 나는 급하게 합류한 케이스였기에 이런 과정들은 대거 생략되었다.
과정이 생략되어 편한 것도 있지만 그만큼 피스보트에 아는 것이 없었다. 승선하고 나서야 피스보트에 대해 서서히 알아가기 시작했다. 크루즈 내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며 알게 된 것도 많고, 궁금한 게 있으면 틈틈이 직원용 컴퓨터로 검색해 알게 된 것도 많다. 그 수많은 정보 중, 피스보트의 탄생 배경에 대한 일화는 단연코 내 가슴에 큰 울림을 주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인 1982년에 일본을 중심으로 엄청난 국제적 파문이 일었다고 한다. 바로 일본의 역사 왜곡 파문. 일본 정부의 주도로 역사 교과서가 일본 침략 역사를 심각하게 왜곡되어 만들어진 것이다. '침략'이라는 단어를 일괄 삭제하고 '진출', '파견'이란 단어로 대체했다. 한국의 8.15 광복에 대해 "일본이 지배권을 상실했다"라는 표현했을 만큼 전범국 옹호적 관점으로 만든 교과서였다. 당시 한국뿐만 아니라 다른 일본 침략의 피해국, 여러 국제사회에서 비판과 반발이 거셌다고 한다.
피스보트의 역사는 바로 여기서 시작되었다. 역사 왜곡 사실을 바로 잡기 위해 와세다 대학생 4명이 파문 다음 해인 1983년에 설립한 비영리단체가 피스보트이다. 배를 타고 전쟁의 현장을 방문해 진실된 역사를 배우고 평화를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뜻을 함께하는 이들을 모집해 교육과 교류의 장을 제공했다. 한때는 한국과 일본 참가자만 모집해 군함도나 위안부 기념관과 같은 일제 만행의 현장을 방문하며 양국 참가자들이 여러 역사적, 사회적 문제를 열린 마음으로 교류하는 프로젝트도 다수 진행했다. 평화를 위한 화합과 연대의 여정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름도 ‘평화’인 이 크루즈는 매년 세 차례, 특별한 항해를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