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무료할 때 지구 한 바퀴 (3)
특별한 크루즈인 만큼, 일반 크루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카지노는 피스보트에 없다. 대신, 피스보트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있다. 바로 교육, 캠페인, 기부 활동들이다.
피스보트에서는 전쟁 피해자나 그들을 돕는 인권 변호사, 구호 활동가, 그리고 교육자들을 초빙하여 승객들이 매일 강연을 들을 수 있게 한다. 기항지에 도착하면 전쟁이나 기후 변화와 같은 국제 문제의 심각성을 알리고 변화를 고취하는 캠페인을 진행한다. 내가 승선했을 때는 가자지구의 종전을 촉구하는 배너 캠페인과 매 기항지 해변에서 플로깅 캠페인을 벌였다. 기부 활동은 전쟁이나 재해로 피해를 본 나라를 위해 때에 따라 진행하며 자선 경매도 한다. 피스보트는 단순히 이러한 활동들을 주도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승객들, 그리고 나와 같은 자원봉사자들 또한 직접 이런 활동들을 기획하여 진행할 수 있는 참여적 문화도 만들어 나간다. 언어 장벽을 느끼지 않도록, 이 문화가 제대로 향유될 수 있도록 통역 자원봉사자들은 소통의 다리 역할을 한다. 아주 중요한 임무다.
피스보트 태생이 일본이라 그런 건지, 코로나로 하늘길이 너무 오래 얼어붙어 타국 사람들이 오기 힘들었던 건지, 내가 탔던 항차엔 일본 승객들이 70% 정도였다. 코로나 전까지만 해도 일본인 승객이 4~50%,를 차지하고 나머지는 다양한 아시아 국가에서 온 승객들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내가 탔던 항차엔 총 1,800여 명의 승객이 탔고, 중국과 대만, 싱가포르, 말레이시아에서 온 승객이 일본 다음으로 많았다. 한국 승객은 30명도 채 안 되는 걸 보면 아직 한국에 피스보트가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았다. 나도 역시 그 인스타그램 팔로워가 아니었다면 피스보트를 알 수가 없었을 것이다.
3개월 반 동안 항해하는 이 크루즈에 시간과 비용을 지불하고 올 수 있는 사람은 주로 경제력과 시간을 가진 은퇴자, 특히 70대 이상의 노인분들이 많았다. 그렇다고 젊은 연령대의 사람이 없는 건 아니었다. 시간과 경제적 여유를 가진 젊은 전문직이나 사업가들도 있었고, 크루즈 비용을 돈이 아닌 시간으로 미리 지불하고 온 승객들도 있었다. 크루즈 출항 전까지 일본의 4천 곳에 피스보트를 홍보하는 전단지를 붙이면서 탑승 크레딧을 모은 20대 초반의 학생들이 그런 사례였다.
나와 같은 통역 봉사자 19명을 포함한 70명의 피스보트 자원봉사자들은 국적, 나이, 문화적 배경, 직업군이 다양했다. 이제 갓 대학에 들어간 20살 신입생부터 의대생, 택시 기사, 교수, 대기업 회사원, 가수, 마사지사, 전문 통역가, 투자 심사역, 전문 여행가이드, 유명 아나운서, 그리고 나 — 백수까지. 각자의 고유한 특성을 가진 자원봉사자와 승객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어떤 이는 가성비 좋은 크루즈 상품이라고 생각해서, 어떤 이는 피스보트의 목표와 비전을 함께 일구고자 탑승했을 것이다. 105일 동안 다양한 사람과 생각이 매일 만나게 되는 이 독특한 공간에서 많은 역동과 감동, 그리고 배움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