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비행, 짐은 푸는 둥 마는 둥, 밖으로 밤늦게까지 먹고 마시고, 바르셀로나 거리를 걸으며 기분을 내고는 숙소로 돌아와 몸을 던졌다. 그러니 여행의 첫 잠자리가 어땠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꿀잠을 잤다.
그래도 역시 여행 초반의 아침은 일찍부터 시작된다. 부지런한 우리의 일행들 모두 마찬가지여서 호텔의 조식 식당의 문을 열고 불 켜는 것을 보면서 들어갔다. 준비하시는 아주머니의 '뭐 이렇게 일찍 오나?'라는 듯한 눈길을 받으며.
고급까지는 아닌 숙소이지만 식당도 깔끔하고 무엇보다 음식이 아주 맘에 든다. 여기서는 평범할지도 모르는 음식들이지만 우리에겐 특별하니까. 얼마 전 기분 내려고 다녀온 역삼동의 모 고급 호텔의 브런치 뷔페보다 훨씬 낫군.
별 3개짜리 호텔의 아침 식사. 이 동네에선 별 거 아닐지도 모르지만 우리에겐 근사해 보임
오늘의 정해진 일정은 오직 하나, 미슐랭 3 스타 레스토랑에서의 런치이다. 이래도 흥, 저래도 흥의 (좋게 말해) 무던한 성격인 우리 일행은 정해진 일정 외에 뭘 해야 할지를 몰랐고, 반쯤은 자유 여행 컨셉으로 기획했던 투어 인솔자 이민영님은 그냥 두고 보기 안타까웠는지 우리를 바르셀로나의 거리로 이끌고 갔다.
먼저 들른 곳은 아침의 보케리아 시장. 미식 여행이라는 컨셉에 구색을 맞추려고 시장 음식들을 먹어볼까 했는데, 고급 점심을 먹어야 했기에 아쉬운 대로 작은 타파스 하나를 맛만 보듯 나눠 먹었다.
보케리아 시장의 핀초바. 이른 시간인데 왜 이리 사람이 많아?
맛만 보자고 한 접시 시킨 "가르반소(병아리콩)". 의외로 양이 많네?
그렇게 돌아다니던 중 들른 까딸라나(Catalana) 음악당. 무언가 찾아가는 일에는 익숙하지 않지만, 떠먹여 주면 먹기는 잘하는 스타일의 우리 일행은 만장일치로 오늘 저녁에 있을 음악당 공연을 보기로 했다. 모처럼 온 여행에서 이런 즉흥적인 이벤트는 재미있는 일이다. (이런 이벤트라도 없으면 또 저녁에 뭘 할지 헤매게 될 거야.)
까딸라나 음악당에서 즉흥적으로 오늘 저녁 "카르멘" 공연표를 샀다.
유명한 타파스 바 엘삼파녜(El Xampanyet). 가이드 해 주시는 이민영님이 여기 한 번 꼭 가보고 싶은데라고 노래를 불렀다. 그러다 결국!...
점심 즈음이 되어 간다. 이번 여행의 공식적(?)인 첫 목적지인 레스토랑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레스토랑의 이름은 라사르테(Lasarte). 오너 셰프는 마르틴 베르사테기. 스페인 셰프로서는 가장 많은 미슐랭 스타를 받았고, 이 레스토랑 역시 미식으로 이름난 바르셀로나에서도 최고 수준의 레스토랑이다.
처음 이 여행을 계획할 때, 여행을 이끈 이민영님은 라사르테와 디스프루타르(Disfrutar) 둘 중에 한 곳을 제안했었다. 일정 때문에 두 곳 모두를 갈 수는 없으니 하나만 가자는 것이었다. 디스프루타르는 당시 미슐랭 2 스타 레스토랑이었음에도 이민영님의 방문기가 너무 인상적이어서 나는 이곳에 대한 호기심이 높았지만, 일행들이 그래도 정통성을 인정받은 3 스타 레스토랑을 갔으면 좋겠다는 의견으로 라사르테가 선택된 것이다.
디스프루타르는 우리가 여행을 다녀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미슐랭 3 스타 레스토랑이 되었단다. 그래서 호기심이 조금 더 커지기도.
혹시 촌스러워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모두들 쭈뼛대기도 했지만, 이민영님이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고 그래서, 레스토랑이 있는 호텔의 로비도 둘레둘레 둘러보고, 레스토랑 앞에서 사진도 찍으면서 레스토랑에 발을 들였다.
이곳이 미슐랭 3 스타 레스토랑! 이거 나 같은 사람이 와도 되는 곳이야? 아직은 뭔가 어색하기도 하고, 혹시라도 이런 데 처음 와 보는 티가 나지는 않을까, 장인어른 처음 뵈러 가는 자리인 듯 발끝부터 정수리까지 뻣뻣한 자세가 되어 버린다.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를 위해 이민영님이 추천을 해 주었다. 가격보다는 이 순간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겠다는 우리의 소심한 결심에 맞게 테이스팅 메뉴(애피타이저부터 메인 디시, 디저트까지 많은 메뉴들을 조금씩 먹을 수 있는 코스 메뉴)와 메뉴마다 알맞은 추천 와인을 같이 먹을 수 있는 와인 페어링을 선택했다.
어떤 음식들이 나오는지 적혀 있는 메뉴를 보았다. 음... 그래... 호오... 이건 참 맛있겠군... 오, 이런 신기한 음식이... 등등 나 자신도 알 수 없는 작위적인 감탄사를 내뱉다 말고, 에라 모르겠다. 내 돈 내고 맛있는 거 먹겠다고 온 건데 웬 스트레스람! 하고 실제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처음 나온 음식은 빵에 발라 먹을 버터. 어엇?! 이게 버터? 역시 비싼 레스토랑이 괜히 비싼 게 아니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