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배가 찼으니 볼거리가 눈에 들어오겠다. 흐린 날이 아쉽지만, 아직 별로 구경을 못한 세비야의 거리를 돌아다녀 보기로 했다.
건물들 사이는 좁고 구불구불한 길이 이어져 있지만, 트램이 다니는 넓은 거리는 광장처럼 느껴질 정도로 평지가 넓어 보인다. 다른 관광지에 비해 사람들도 그렇게 많지 않아서 깨끗한 거리와 함께 고풍스럽고 운치 있는 건물이 어우러져 다른 어떤 곳보다 깔끔한 인상이 남는다.
여기가 오페라 카르멘의 배경이라는 (무려) 왕립 담배 공장 건물
옛날엔 담배 공장이었지만 지금은 세비야 대학으로 사용 중이라 한다.
저녁 일정인 플라멩코 박물관으로 발길을 옮겼다.
플라멩코 박물관의 입구 (Museo del Baile Flamenco)
"박물관(Museo)"이라는 이름 때문에 거창한 건물일까 하고 생각했었지만, 복잡한 골목길 사이에 있는 오래된 작은 건물들 중 하나였다. 플라멩코 공연이 시작되기까지는 시간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위층의 교육실에서 플라멩코를 전수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잠시 시간을 보냈다.
이번 여행에서 처음 본 한국어 인쇄물. 여행객은 한국인만 잔뜩 보였건만
플라멩코 교육이 이뤄지고 있는 곳. 분위기를 봐서는 전문 교육 같았다.
소극장 크기의 공연장 맨 앞 줄에 앉았다. 관객석의 조명이 꺼지고 무대 조명이 켜진 후 공연 소개가 있었다. 그리고 기타 연주와 함께 플라멩코 공연이 시작되었다.
플라멩코 공연을 보러 간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솔직히 조금 걱정이 앞섰다. 관광지에서 으레 보는 조금 허술한 공연이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었다. TV의 여행 프로그램에서 봤던 플라멩코 공연도 그런 의심을 불식시키진 못했었다. 하지만 눈앞의 공연을 보면서 그런 걱정이 말끔히 해소되었다.
비록 별 지식도 없는 여행자의 눈이지만 우리가 보고 있는 플라멩코는 단순히 관광용 보여주기 식 플라멩코가 아님은 확실했다. 그동안 내가 가지고 있던 플라멩코의 지엽적인 생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연륜이 묻어나는 몸짓과 표정에서 진한 감정까지 전달되는 듯했다.
흩날리는 땀(?)이 우리 자리까지 뿌려졌다. 하지만 일부러 물을 축였을 거라는 것이 우리 일행들의 중론
저녁 식사는 세워놓은 계획이 없었다. 즉흥적으로 동네 마트에서 먹을 것을 사서 공원에서 먹자는 얘기가 나왔다. 마트에서 와인과 하몬, 과일, 접시 등등을 사서 공원을 찾아 세비야의 밤거리를 헤맸다.
세비야의 가장 유명한 곳이라고 할 수 있는 스페인 광장에 도착했다. 날도 그리 춥지 않고 사람도 없고 조용한데, 스페인 광장에는 마치 그러라고 만들어진 것처럼 벤치와 테이블로 써도 손색없어 보이는 구조물이 있었다. 이렇게 멋진 곳에서 와인을 마시며 시간을 보내면 얼마나 운치 있겠나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외국 관광객이 경복궁에서 소주와 수육을 먹는 모습을 보면 우리가 어떻게 느낄까를 생각해 보니, 자리를 옮기는 게 좋겠다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이렇게 온전한 풍경을 볼 수 있을지 기대를 못해서 그런지 더욱 멋져 보였던 스페인 광장의 야경
조금 자리를 벗어나니 벤치가 있는 공원이 나왔다. 옆에는 밤늦은 시간임에도 중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아이들이 악대 연습을 하는 듯 관악기와 북소리가 요란을 떨고 있었다. 스페인 광장의 풍경도 보이는 곳이니, 가벼운 스페인식 저녁을 먹기에 무리한 곳은 아닐 것 같다.
건너편으론 스페인 광장의 야경을 두고, 우거진 나무 아래에서 소박한 건배를 하니 여러모로 운치가 넘치는 밤이다.
시원한 게 먹고 싶어 집어 든... "우에보(Huevo)? 분명 배운 단어인데 뭐더라?"하고 한 모금 꿀ㄲ...웩 아! 생각났다. 달걀이었구나! 근데 왜 주스들 사이에 진열을...
"체리모야"라고 하는 과일. 후숙이 되면 엄청 달고 맛있는 건데 이건 아직 익기 전이구나... ㅠㅠ
그렇게 기분을 내고 있으니, 연습을 하던 악대의 멤버들도 우리에게 손을 흔들며 자리를 떴고, 뒤이어 몸집 거대한 남자가 나타나 우리에게 여기서 뭐하느냐고 물었다. 공원, 또는 스페인 광장의 관리인인 듯했고, 여기서 음식을 먹고 있는 것이 문제일까 싶어 잠시 위축됐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 스페인 광장이 문 닫을 시간이니, 자리를 정리하란다. 자리를 정리하니 친절하게도 출구까지 우리를 안내해 준다. 역시 먹고 즐기는 게 문제가 아닌 것은 스페인이라 그런 것인가?
숙소에 돌아가기 싫을 정도로 운치 있고 아름다운 세비야의 밤거리
숙소로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 만찬을 즐기기로 했다. 이민영 가이드가 우리를 데리고 간 곳은 El Rinconcillo라는 이름의, 문을 연 지 무려 350년이 됐다는 타파스 바이다. 음식보다는 분위기가 궁금해지는 곳이다. 직원들은 모두 말끔한 제복을 입고 있는데, 대부분 연륜이 있는 어르신들이다. 우리가 볼 수 있는 범위에서는 앉는 테이블은 아예 없고, 바와 테이블 모두 서서 먹는 곳이다.
350년 된 타바스 바 "El Rinconcillo"
이렇게 먹어도 음식값이 별로 안 비쌌던 걸로 기억된다.
세비야에서 받은 느낌이 여유롭고 편안해서 그런지 밤의 술자리도 부담 없고 즐겁기만 하다. 낮의 Bodega Santa Cruz도 그렇고, 여기 El Rinconcillo도 엄청 유명하고 음식 맛도 분위기도 좋은 곳인데, 세비야 대성당에서 봤던 그 많은 한국인 여행객들은 도대체 어디서 어떤 음식들을 먹느라 이런 곳에선 보이지 않는 것인지 궁금하도고 의문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