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모든 것이 멈춘 듯한 필리핀에서의 날들

아기자기한 바다의 정석, 필리핀 아닐라오

by 제인

맑고 파란 하늘을 좋아한다.

그 파아란 하늘에 떠있는 둥글둥글 솜사탕 같은 뭉게구름을 좋아한다.

뭉게구름 사이사이를 뚫고 신비롭게 내리쬐는 빛 내림을 좋아한다.


파란 하늘의 뭉게구름과 따스한 햇빛줄기들은

과호흡이 왔을 때, 마음이 불안해서 날뛰는 심장을 가라앉힐 때

나를 조금이나마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풍경이다.


그런데,

이 풍경을 바닷속에서도 볼 수 있다면 어떤 기분일지 상상할 수 있겠는가?


2022년, 드디어 해외여행 제한이 풀렸다.

나의 짝꿍을 따라 지난 몇 년간 잠수풀장과 국내 바다를 전전하며 특훈을 거쳤다.

이제 부력 조절에 대한 자신감도 생겼고, 그 덕분에 나의 두려움을 잠시 망각할 수 있도록 도와준 카메라의 사용이 가능해졌다. 야호!


이번에 내가 짝꿍과 모험을 떠난 곳은 필리핀의 아닐라오라는 도시였다.

비행기를 타고, 굽이굽이 길을 따라 차를 타고 다이빙샵을 향해 가는 내내 마음이 너무 설레었다.

보라카이에서는 무서움이 가장 큰 감정이었기 때문에 니모(흰동가리) 말고는 기억에 남는 것이 거의 없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필리핀 바다는 나에게 처음이나 마찬가지였다.


물에 조금은 익숙해진 내가 이번에는 물을 즐길 수 있을까?

내가 보게 될 바닷속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도착한 곳은 바닷가가 바로 앞에 놓여 있는 외딴곳의 다이빙샵이었다.

다이빙 외에는 근처에 할 수 있는 것이 정말 하나도 없었다! 우리나라 농촌의 시골집 같은 느낌이랄까?


다이빙을 하기 위해 장비를 챙기고, 다이빙 크루의 도움을 받아 짐을 옮겼다.

배를 타고 다이빙 포인트로 나아가는데 이게 방카의 모터소리인지, 쿵쾅거리는 내 심장 소리인지,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낯선 바다를 마주했다.


그렇게 입수한 바다는,

봄처럼 따뜻하고

많은 연산호들이 살랑살랑 손을 흔들며

열대어의 찬란한 빛들로 나를 반겨주었다.

어서 와, 아닐라오는 처음이지?


호흡은 여전히 불안정했지만, 이 모든 무서움을 잘 참아내고 여기까지 온 나 자신이 기특할 정도로 좋았다.

알록달록한 누디브런치(일명 갯민숭달팽이)를 보면서 세상에 이렇게 귀여운 생명체가 있다는 것에 꺅꺅 소리를 질렀다. 첫 다이빙 자격증을 딸 때 너무 무서워서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한 니모가 희미한 형광빛을 띠고 있어 마치 CG를 보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바위 속에 숨어 눈만 깜빡거리던 문어도, 산호에 몸을 숨겨 붙어있던 피그미 해마도(심지어 임신한....!), 약이 잔뜩 올라 동글 뾰족해진 복어도, 트럼펫을 닮은 노란 트럼펫 피시도...

일러스트로만 봐왔던 바닷속 생명들을 내 눈으로 하나하나 담을 수 있었다.

배가 뽈록한 피그미 해마를 찾으셨나요?


이게 말이 돼? 이런 세상이 있었다고?

너무 신이 난 나머지 바닷속에서 본 것들을 쉴 새 없이 쫑알쫑알 떠드는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내 짝꿍.

이런 바닷속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한다. 이렇게 좋아할 거면서 왜 시도도 하지 않으려고 했냐면서.




"아, 아닐라오 바다가 처음이에요? 아이 그러면 더 신기한 거 알려드려야겠네.

그거 아세요? 아닐라오 바닷속은 온천 포인트가 있어요. 제가 계란 삶아드릴게요."


일명 스프링 버블 포인트.

수중 유황 온천으로 바닥의 모래를 뚫고 기포가 보글보글 올라오는데 바닥을 만져보면 정말 찜질방 바닥처럼 뜨끈뜨끈하다. 보통 다이빙 타임이 40-50분 정도 되는데, 입수하자마자 계란을 땅에 파묻고 즐겁게 유영을 하고 돌아오면 완숙까지는 아니어도 삶은 계란처럼 익힐 수 있다는 것이었다!! 강사님께서 주섬주섬 계란을 챙기시길래 이미 삶은 달걀 챙기시는 거 아니냐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더니, 허허 웃으시면서 바로 하나를 깨서 날계란임을 인증해 주셨다.

들어는 보셨나요! 수중 온천의 천연찜기!

말도 안 돼!!! 진짜 익었다. 천연찜기가 바다에 있었어!


다이빙을 하는 3일 내내 '말도 안 돼'라는 말을 가장 많이 했던 것 같다.

바닷속세상도 아름답고, 육지세상도 아름답고, 모든 것이 평화롭고 예뻤다.

그리고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도 아닐라오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바다이기도 하다.


원래 하던 대로 무섭다고 힘들다고 도망쳤더라면,

나는 할 수 없다고, 미리 선을 그어놓고 그 선을 넘어가려고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 세상을 만날 수 없었을 것이고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요즘 즐겨 듣는 팟캐스트에 ≪책플릭스≫라는 채널이 있는데,

거기서 우연히 정이삭 감독의 <트위스터스> 영화에 대한 소개를 듣게 되었다.

영화 속 명대사인 "You don't face your fears, you ride them."를 듣고 머릿속에 전구가 번쩍 켜지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물을 무서워하면서도 다이빙을 계속하는 이유를 설명해 주는 말이었던 거지.

맞서 싸우듯이 두려움에 직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올라타보라는 것.

두려움에 올라탄다면 아등바등하면서 어떻게든 통제해 보려고 애쓰겠지.

온몸에 잔뜩 힘을 주고 악을 쓴 탓에 아프고 고통스럽게 느껴지겠지.

그러다가 두려움에 익숙해지고 유연하게 조절하는 방법을 조금씩 깨닫게 된다면

휩쓸려 다니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함께 유연하게 움직이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는 것이겠지.


처음으로 같이 찍은 수중셀카. 나 많이 성장했다 정말.

나는 이제 안다.

내가 물을 무서워하는 것은 맞서 싸우고 이겨낸다고 제거할 수 있는 적수가 아니라는 것을.

두려움은 나를 보호하면서도, 묵묵히 견뎌내었을 때 그 안에 숨겨진 희열을 꺼내어주는 원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내가 조심조심 성장할 수 있도록 갈피를 잡아주는 존재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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