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아다니는 발리의 양탄자 앞에 멈춰 선 인간

Giant Manta Ray, 스페인어로 '양탄자'를 뜻하죠.

by 제인

장기연애.

보통 2-3년 이상의 만남을 지속해오고 있는 커플에게 붙는 배지와 같은 그것.

하하. 2-3년이라니 가소롭군.


글의 초반부터 지속적으로 언급되고 있는 나의 짝꿍은 자그마치 16년이나 나와 함께 했다.

오랜 시간을 함께 한 만큼 서로의 성향과 장단점에 대해 잘 알고 있고,

우당탕탕 사건사고도 다양하게, 정말 치열하게 서로를 겪어왔다.


물론, 그만큼 서로의 가족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미리 이야기해 두자면,

짝꿍의 부모님께서도 이 긴 시간 동안 항상 사랑의 눈길로 지켜봐 주신 누구보다도 감사한 분들이다.


짝꿍이 군대를 가있던 2009년은 갑작스럽게 신종플루가 발병했다. 전염병의 위협으로 가족을 제외한 모든 이들의 면회가 금지된 상태였고, 부모님께서는 나를 딸과 다를 바 없는 거 아니냐면서 기꺼이 첫 면회에 나를 데려가주셨다. 이것이 부모님과의 긴 인연을 시작하게 된 첫 만남이었다. 대화가 많지 않은 우리 집과는 달리 화목한 분위기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너무 낯설었다. 지금 다시 떠올려봐도 긴장해서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몰랐고 추운 날씨에도 땀이 났다. 귓가에는 심장이 줄넘기를 하고 있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나이가 든다면 짝꿍의 부모님과 같은 모습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심지어 내가 알고 있는 어른 중에 사랑한다는 말을 가장 많이, 자연스럽게 전하게 되는 분들이 되었다. 기쁜 일, 가슴이 찢어지는 일, 축하할 일, 눈물 흘릴 일을 함께 했고, 자주는 아니지만 캠핑이나 여행도 같이 다녔고, 긴 시간을 보내면서 누구보다 애정하고 신뢰하는 가족이 되어갔다.


그래서 이번에는 새로운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큰 아버님댁과 사촌형님 댁도 다 함께 한 대가족의 여행! 바로 발리로!!!

이 여행은 얼큰하게 취하신 큰 아버님과 짝꿍의 대화로 속전속결 진행되었다.


"아이, 큰아버지가 비행기랑 다 해주시면 어디든 가죠."

"그려. 카드 줄게. 비행기 끊어. 근데 나는 좁은 비행기는 안타."


이렇게 통 큰, 쿨한 결제라니!!!

이 감사한 기회를 제대로 살려야겠다는 의무감으로 열심히 여행 계획을 세웠다.

사누르에서는 휘황찬란한 펜션과 바닷가에서의 휴양, 우붓에서는 울창한 정글과 자연과의 만남들을 가졌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하루이긴 하지만 사심을 가득 채운 발리에서의 다이빙까지! 발리의 누사페니다는 만타와 개복치를 볼 수 있다고 해서 너무너무 기대가 되었다.


사실 짝꿍의 바다 사랑은 아버님을 쏙 빼닮았다. 아버님께서도 모험을 즐기시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을 좋아하신다. 그리고 바다라면 그 누구보다 빠르게 달려들 준비가 되어 있는 분이셨다. 게다가 아버님께서는 나보다도 더 먼저 스쿠버 다이빙 오픈워터 자격증을 따셨지만 기회가 많지 않아 그저 바다에 들어갈 날만 기다리고 계셨다. 대가족이 여행을 와서 따로 다이빙을 하기 위해 빠질 수 있던 이유는 바로 아버님 덕분이었다. 처음에는 아버님께 다이빙 제안을 드렸을 때는 아무 말씀 없으셨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아버님께서는 좋으실수록 말수가 적어지신다는 것을. 무언의 긍정!

찾으셨나요? 가운데에 개복치 있어요!

아버님께서는 너무 오랜만에 다이빙을 하신 탓에 체험 다이빙처럼 짝꿍과 마스터에게 탱크를 붙잡힌 채로 끌려다니시기는 했지만 바닷속세계를 보았다는 자체로도 너무 행복해하셨다. 첫 다이빙에서는 턱이 덜덜 떨릴 정도로 차가운 수온층이 있었는데 거기서 정말 운이 좋게도 개복치를 만났다!! 사진을 남기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줌을 당겨서 찍은 것이라 화질이 좀 깨지긴 하지만 너무너무 신기했다! 개복치 그림과 너무 똑같은데 생각보다 많이 컸다. 그리고 소심한 개복치답게 버블 소리를 듣고는 순식간에 더 깊은 물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사진으로 남기지 못했다면 다른 사람들은 개복치를 보았다는 내 말을 믿지 못했을 정도로 빨랐다.


그리고 마주한 만타의 클리닝 스테이션(Cleaning Station).

만타 레이처럼 큰 어류들은 몸에 붙은 기생충이나 병든 조직, 이빨 사이에 낀 음식물 찌꺼기를 제거하기 위해서 주기적으로 일정한 지역에 모인다고 한다. 이곳에서 청소 놀래기와 같은 물고기가 만타에게 접근해서 몸을 청소해 주는데 누사페니다에는 만타의 클리닝 스테이션이 있고, 이때 떼를 지어 다가오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했다.


클리닝 스테이션에 도착해 보니 커다란 암초가 있었다.

자연이 인간을 기다리는 법이 없으니, 인간이 기다려야지!

만타의 길을 막지 않도록 옆으로 비켜서 모래사장 위에 조용히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도 오만이라는 듯 만타 레이는 기꺼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었다.

저 멀리서 검은 무언가가 울렁이며 다가오더니 이내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우며 지나갔다.


상단에 멀리 떨어진 인간의 크기와 비교해 보세요!

알라딘의 양탄자처럼 크고 빠른 무언가가, 무릎 꿇고 경건하게 기다리는 인간들의 위를 여유롭게 훑고 지나갔다. 그 앞에 우뚝 멈추어 선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로 멍하니 그들을 바라봤다. 혹시나 만타가 공격하지는 않을까, 그 거대한 몸뚱이 앞에서 덜컥 겁이 나 과호흡이 오는 건 아닐까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그냥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호흡만 유지한 채 그 풍경을 바라만 보았다.


경이로운 것을 보면 그냥 그 모습에 빠져들어서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말이 맞았다.


그 커다랗고 통통한 몸이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모습을 보면 '와...'라는 감탄사 밖에 나오지 않는다.

말 그대로 '와...'이다. '와!!!' 이것과는 전혀 다르다.

놀라운 것이 맞는데, 놀라우면서도 침착하고, 그 부드러운 움직임에 내 마음마저 부드러워지는, 그런 느낌이랄까? 그리고 그 위용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으면서도 새하얀 배를 보면 귀엽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사이판에서 나를 인어공주처럼 만들어주었던 나비고기들의 귀여움과 신비로움에 이어,

발리에서는 만타가 알라딘의 양탄자처럼 비범하고 장대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위에 올라탈 수는 없겠지만 그들의 자유로운 날갯짓에 나도 그들과 함께 날아다니고 싶었다.


육지로 올라와 가족들에게 만타에 대해 자랑하시는 아버님을 보고 소년의 모습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짝꿍이 무언가에 신나 하는 모습과 정말 많이 닮아있었다. 앞으로도 이렇게 바닷속세상을 같이 탐험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여행이었다.


자연은, 바다는 나를 얼마나 더 놀라게 할까?

다이빙을 하는 매 순간 명상을 하는 것처럼 깨달음을 얻고 겸손해진다. 바다의 찬란하면서도 고요한 풍경을 이 세상 사람들이 다 알았으면 좋겠다.


클리닝 스테이션 상단 쪽에 만타가 지나가는 모습이에요:) thanks to J.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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