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쓰는 예히 Aug 09. 2024

정전

인간은 적응의 동물


페루, 이키토스살이 일주일차, 벌써 3번의 정전을 겪었다. 첫 번째 정전은 이키토스 도착 첫날, 1년 동안 살 집에서 짐정리를 하고 있을 발생 했다. 다행히 첫 정전은 대낮에 일어났다. 갑자기 불이 꺼지고, 동시에 에어컨도 꺼져버렸다. 낮이라 불은 꺼져도 상관이 없었지만 에어컨이 꺼진 건 곤란했다. 가뜩이나 짐정리를 하느라 땀을 흘리고 있는데 말이다. 에어컨이 꺼진 상태로 더 이상 힘을 내서 짐정리를 이어갈 수 없어 가만히 앉아 망연자실하고 있을 때였다. 옆집에서 따로 짐정리를 하던 한 친구가 마트를 가자고 제안했다. 어차피 필요한 물건들을 사야 하니 지금 정전이 됐을 때 다녀오자는 것이다. 다행히도 우리 팀에 현명한 동생이 한 명 있음에 감사하며 서둘러 나갈 준비를 했다.


짐을 챙겨 근처 마트를 가는 길, 지난번과는 이 동네가 다르게 느껴졌다. 이키토스의 첫인상은 솔직히 어둡고, 더럽고, 삭막하다고 느꼈었는데…. 그때 일주일을 지내면서 익숙해진 것인지, 이제 1년을 살아야 하니 마음이 자연스레 가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툭툭이를 타고 마트를 가며 보는 풍경들이 그냥 정겹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어느 시골마을의 작고 평화로운 동네 같기도 했다. 


마트에 도착해 필요한 물건들을 사는데 갑자기 마트 전체 불이 꺼졌다. 마트에도 정전이 발생한 것이다. 다행히 마트는 금방 다시 불이 들어왔다. 하지만 장을 보고 집에 왔는데도 우리 집의 전기는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가만히 있을 순 없어서 짐 정리를 하다 보니 드디어 불이 켜지고, 에어컨도 다시 켜졌다. 이렇게 나의 첫 정전이 지나갔다. 큰 불편함 없이.

 

두 번째 정전은 며칠 뒤, 저녁에 발생했다. 한 번 겪었다고 ‘아, 또 정전이구나’ 싶어서 바로 휴대폰 전등을 켰다. 금방 불이 들어오겠지 싶어서 가만히 있었는데 생각보다 오래 정전이 지속됐다. 그렇다고 계속 가만히 있을 수는 없으니 작은 불빛에 의지한 채 화장실도 가고, 휴대폰도 보고, 스페인어 공부도 했다. 약 1시간을 어둠 속에서 생활한 것이다. 한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 기분이 이상했다. 태풍이 온 것도 아닌데, 평일 저녁에 갑자기 정전이라니 말이다. 점점 불편해질 때쯤 드디어 전기가 들어왔다. 이렇게 또 한 번의 정전이 지나갔다. 한국에 있는 나의 오랜 친구에게 이 상황을 말하니 “정말 특별한 경험이네. 나중에는 할 수 없는.”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맞다. 지금, 여기서만 할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한국으로 돌아간다면 없는 경험. 


세 번째 정전도 그다음 날 저녁에 바로 발생했는데 이제는 익숙하게 휴대폰 전등을 켜서 하던 일을 이어했다. 그리고 생각보다 빨리 정전이 끝나고 다시 불이 들어왔다. 갑자기 불이 꺼지고, 온 세상이 암흑이 되어도 태연하게 생활이 가능하다니. 인간의 적응력이, 나의 적응력이 이토록 빠르단 말인가. 앞으로 얼마나 더 이런 일이 자주 있을지 모르겠다. 아직까지는 큰 불편함이 없어서 다행이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기 때문에 걱정도 된다. 계속 이렇게 아무렇지 않아야 정신 건강에 좋을 텐데 말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