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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아무도 모르게

11월 3일, 첫째 날

by 전용호

어느 정도의 구상은 있었다. 남으로 내려왔으니 북으로 올라가자. 그러다가 마음에 드는 장소에 텐트를 치고 자자. 끝.


참으로 단순한 바램이었다.


땅은 각자의 주인이 있다. 함부로 텐트를 설치할 수 없다. 가능한 장소는 정해져 있다.


어릴 때 난 자동차 뒷좌석에서 그저 풍경을 만끽하고 바람을 향유했다. 그 후, 나이를 먹고 뒷좌석이 아닌 운전석에서 주위 차들을 경계하고 신호를 감시하고 속도계를 노려봤다. 운전석에는 낭만이 없었다. 법규만이 있었다. 그걸 어른이 되어서야 알았다.


여전히 난 어린애에 불과했다.



“진짜 몰랐나 보네? 괜찮다. 모를 수도 있제~ 편하게 생각해라, 편하게. 안 걸리면 되는 거 아이가? 그제? 남들 안 보이는 곳에 깔든가 아니면 주변에 잘 데 찾아봐라.”

“알았어, Thanks, Bro.”

“그래, 내일 살아있으면 생존 보고하고~ 야, 야!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생명보험은 내 쪽으……”



뚝.



캠핑장이 있는 이유가 있구나.


이걸 이제야 생각해봤다. 일단은 걷자. 걸으면서 정하자. 주변에 캠핑장을 알아볼지 아니면 몰래 텐트를 칠지 생각해봤다. 우선 안전하게 캠핑장을 찾기로 했다. 웬만하면 가는 길에 있어야 한다. 가는 길에 있어야 한다면 가는 길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나는 가는 길을 모른다. 그래서 가는 길을 먼저 알아보기로 했다.


지도 앱을 보기 전, 북으로 올라가는 환상 속의 루트는 곧은금 같이 깔끔한 직선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울퉁불퉁했다. 지금의 내 감정회로 같았다.


해변가를 따라 걷기로 했다. 주변에서 가장 큰 도시인 해남읍을 목적지로 설정했다. 긴급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고 사야 할 물건이 생긴다면 빠르게 구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야 가는 길이 정해졌다.


캠핑장을 알아봤다. 약 6km 정도 거리에 캠핑장 하나가 있었다. 운도 좋다. 부디 이 운이 집에 도착할 때까지 이어지길 소원했다.





여러 마을을 지나쳤다. 흥미롭게도 마을마다 입구에 마을명을 세긴 바위가 있었다. 설마 우리 동네도 이렇게 바위에 새겨 있지 않을까. 만일 있다면 설마 내가 못 본 걸까.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같은 동네에서만 자랐는데 그거 하나 못 봤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아니다. 말이 될 수도 있다.


우리 동네에는 귀신 골목이라는 곳이 있다. 난 지금까지도 그 골목을 가본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무서워서 그랬다. 이제는 당연하다는 듯 지나쳐 간다. 만일 거기에 마을명을 세긴 바위가 있다면. 우리 동네의 상징이 그곳에 있다면.



나는.


아, 정말 나는.



그래. 이 여정이 끝나면 반드시 그 골목을 가리. 없다면 돌멩이 하나 주워 붉은 팬으로 이름 하나를 쓰고 골목 입구에 두고 가리. 동네 이름인지, 골목 이름인지, 내 이름인지는 그때 생각하고 적으리.


간판 하나가 보였다.




“국토종단 6.1km 지점입니다?”



생각보다 많이 왔구나. 작은 보람이 느껴졌다. 앞으로 하루에 몇 km씩 걸어야 할지 생각해봤다. 살면서 가장 많이 걸었을 때가 마카오에서 길을 잃었을 때다.



29.1km.



아직도 기억난다. 항구 앞에서 유심칩을 열심히 팔던 마카오 사람들. 난 돈 좀 아껴서 맛있을 것을 먹겠다고 그들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들은 나에게 온화한 미소로 다가왔지만 난 악독하게 지나쳤다. 이제는 안다. 그들은 유심칩을 팔려는 게 아닌 나에게 마카오의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 주려 왔다는 걸. 그리고 내가 그들에게 유심칩을 선물처럼 받고 그들에게 돈을 줬다면 그건 그저 작은 감사함을 표하는 것뿐이라는 걸.


과거의 경험을 발판 삼아 하루에 30km씩은 걷기로 했다. 그때는 슬리퍼를 신고 개고생 한 거라 힘들었지만 지금은 운동화를 신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생각해보면 지금 슬리퍼 대신 무거운 배낭을 메고 있다. 그렇다면 하루 30km씩 걷는 건 힘들지 않을까. 체력이 좋은 편도 아닌데 말이다. 뭐 상관없다. 처음에만 고생하자. 배낭의 익숙함을 기다리는 것처럼 하지의 익숙함도 기다려보자. 걷다 보니 생각이 길어졌다. 하늘을 보니 그 누군가가 검은색으로 거의 다 칠했나 보다. 이제 태양보다 달을 찾는 게 더 쉬워졌다.



어느 정도 걸었다고 생각했는데 캠핑장이 보이지 않았다. 지도 앱을 켰다.


3km 정도 남았다. 뒤 돌아 걷을 경우 말이다. 망했다. 이미 지나쳐 버렸다. 그러고 보니 아까 간판에서 6.1km라고 친절하게 얘기해줬는데.



나는.


아, 정말 나란 놈은.



어쩔 수 없이 계획을 바꿨다. 남들에게 피해 주지 않게 사람이 안 보이는 곳에서 텐트를 치기로. 가능한 한 빨리. 그 누군가가 하늘에 검은색을 다 칠하기 전에.



내 꼬락서니가 한 마리의 도둑놈 같았다. 주변에 사람들이 있나 주위에 잘 곳이 있나 눈알은 리듬을 타듯 좌우로 왔다리갔다리 거렸다. 막상 텐트 칠 장소를 찾으려니 어려웠다. 바닷길이라서 그런지 외진 곳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운이 이어지길 소원했었다. 분명 색을 다 칠한 그 누군가는 그걸 듣고 잊지 않았으리. 나는 믿었다. 그래서 운 좋게 발견했다.


바다 길 중에 다리로 된 구간이 있었는데 그 다리 밑이 야영지로 적합했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혹시 내가 다리 밑으로 내려가는 걸 볼 사람이 있을까 한번 뒤를 스윽 봤다. 아무도 없자 조용히 내려갔다.



무거운 가방을 내려놓고 텐트를 꺼냈다. 원터치 텐트라서 분명 어디인가에 버튼이 있겠지. 그 예감으로 텐트를 만지작만지작 거리며 찾았다. 그러다 갑자기 텐트가 쫙! 펴졌다. 놀라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버튼은 없었다. 단지 고무밴드 하나만 풀면 알아서 펴지는 구조였다. 어찌어찌 텐트를 설치했다. 텐트 안으로 입성했다.


혹시 누군가 신발을 훔칠까 싶어 텐트 안으로 넣었다. 역시 3~4인용 텐트라서 혼자서 뒹굴 수 있을 정도로 컸다. 하지만 아늑하지는 않았다. 바닥이 차가워 침낭을 피고 그 위에 앉았다.


어두웠다. 텐트 안을 밝게 비쳐줄 무언가 필요했다. 생각해보니 손전등을 챙겨 왔었다. 손전등을 켜려고 가방을 열었다.



어라. 이게 뭐지?



내가 넣지 않은 무언가로 가득 찬 검은 봉투가 있었다. 무엇이 들어 있을까. 지금 같은 상황에서 이 검은 봉투는 나의 마음속에 공포로 가득 차게 만들었다. 안에 내용물을 봤다.


우비, 맛밤 2개, 고구마 말랭이 2개, 핫팩 5개, 믹스커피 5개가 들어 있었다.


아마 아빠와 누나가 넣었을 거다. 고마웠다. 너무 고마운 마음에 시야가 흐려질 정도로 눈물이 맺혔다. 이 감동을 표현하고 싶었다. 눈물을 닦으며 바로 전화를 걸었다.



“연결이 되지 않아, 음성 사서함으로 연결되며……”



누구도 받지 않았다.


잊고 있었다. 나는 없는 빈자리란 걸.


방금의 감동은 자연스럽게 수그러들었다. 때마침 저녁도 먹을 시간이라서 맛밤, 고구마 말랭이를 하나씩 먹기로 했다. 하지만 전에 먹은 ‘전라도 한정식’이 아직 장에 머물러 있어 많이는 못 먹을 거 같았다.



이왕 먹는 거 콘셉트라도 잡고 먹어 볼까. 영화의 한 장면처럼 먹어 보기로 했다.


텐트 안에서 추위에 떠는 장면이 있는 영화를 머릿속에서 뒤져봤다. 주연배우가 아빠를 닮아 영화 출연했냐며 놀렸던 ‘노스페이스’, 중학교 시절 좋아하던 여자애와 처음으로 같이 봤던 ‘투모로우’, 엄마가 재미있다고 너도 꼭 보라며 추천해줬던 ‘에베레스트’.



아, 영화마다 한 편의 추억이 담겨있었네.



감수성에 빠지기 전에 그냥 벌벌 떨면서 먹기로 했다. 처음에는 천천히 먹다가 살기 위해 허겁지겁 먹는 시늉을 했다. 그러다 추위에 손이 얼었다며 음식을 떨어뜨려 보고 손이 안 움직이는 상황인 척 손을 내리고 입으로 거친 숨소리와 함께 허둥지둥 먹어봤다. 맛나게 재미있다.


그렇게 난 맛밤과 고구마 말랭이를 다 쳐 먹어 버렸다. 하나씩만 먹기로 했는데. 너무 감정 몰입했나 보다. 그래도 배가 든든하니 몸이 따뜻해졌다.



그래. 몸뚱아리야.


더 많은 열을 내어 못난 주인이 과오로 만든 지방을 태워 주렴.



그래도 혹시 자다가 추워질 수 있으니 핫 팩을 2개 터뜨렸다. 군대 혹한기 때도 하루에 2개씩 터뜨려서 이 정도면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이제 자 볼까. 침낭 안으로 뜨끈해진 핫팩을 발, 허리에 하나씩 배치하고 누웠다. 부디 얼어 죽지 않길. 그리고 타인의 방문이 없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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