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4일, 둘째 날
짜증 났다. 눈은 뜨지 않았지만 감정을 느끼는 걸 보아 나는 일어나 있었다. 아니 일어나 버렸다가 맞는 말 같다. 잠을 잘 수 없게 온 몸이 젖어 있기 때문이다. 혹시 어제 먹은 물통을 쏟은 건 아닐까 싶었다. 아니다. 분명 어제 뚜껑을 잠그고 잔 기억이 있다. 그렇다면 설마 이 나이에 자면서 실례를 범한 건 아닐까.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 건 나의 흑역사 속이 아닌 축축한 농도에서였다. 하지만 그것 또한 아니다. 지금 몹시 화장실을 가고 싶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내 몸이 축축해져 버린 걸까. 비가 온 것도 아닌데.
“아, 비?”
잠이 확 깼다. 비가 온다는 건 날씨가 안 좋다는 말이다. 날씨가 안 좋다는 건 어부들이 일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어부들이 일을 하지 않는 건 바다가 위험하다는 말이다. 그리고 난 위험한 바다 앞 해변에서 자고 있단 말이다. 본능적으로 산지 얼마 안 된 핸드폰을 잡고 텐트 문을 뜯다시피 열었다.
눈부신 태양에 눈이 감겼다. 차츰 빛에 적응되자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조광에 비친 날씨는 아름답게 맑았다. 혹시 새벽에 비가 왔나 싶어 모래를 만져봤다. 말라 있었다. 고요한 아침 해변에는 내 심장만이 일정한 리듬을 새기고 있었다.
거 참, 이해가 안 가네.
다시 안으로 들어가 텐트를 살펴봤다. 기이하게도 천장부마저 다 젖어 있었다. 바다 때문에 습해서 생긴 현상 같았다.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리. 뚝뚝 떨어지는 아침이슬을 피해 모든 짐을 빼서 바다 앞 정자에 두었다.
몸이 젖어서 그런지 그저 그런 바람이 차갑게 느껴졌다. 텐트를 들어서 아침체조 하 듯 힘차게 털었다. 얼굴에 소나기가 오는 것만 같아 나도 모르게 던져버렸다. 차라리 좀 걷다가 점심 먹을 때 일광건조시키는 게 더 나을 듯싶었다.
오늘 아침으로는 뜨끈한 라면에 아메리카노 한잔으로 시작하고 싶었다. 하지만 물이 적었다. 생라면을 그냥 살짝 부셔서 수프에 찍어 먹기로 했다. 예전부터 라면을 좋아하지 않았다. 라면을 한 달에 1번 정도 먹을까 말까 하는데 바다를 보며 먹는 이 라면은 너무나도 맛있었다. 뒤돌아 제주 흑돼지를 파는 맛집을 보기 전까진 말이다. 식 후 정자를 청소하고 짐을 정리했다. 배낭을 멘 후 한 손에는 남은 커피가 든 잔을 들고 바다를 세월없이 보았다.
아무도 없는 해변에서 나만이 보는 바다는 오래 기억되겠다.
어제는 10.4km를 걸었다. 다리는 멀쩡했지만 어깨가 좀 쑤셨다. 오늘은 해남읍까지 30km 조금 넘게 걸어야 하는데 과연 내 몸이 얼마나 고통스러워할지 궁금했다. 잠은 찜질방에서 자기로 했다. 내일모레를 위한 피로 회복도 이유이지만 가장 큰 이유는 결벽증이 있는 나로서는 더러운 내 몸은 감당할 수 없었다. 축축한 상태로 땀을 흘리면서 걸을 텐데 어제 만난 좀비 부부보다 더 냄새를 풍기며 다니게 될까 봐 노심초사했다. 11월이라 몸이 축축해질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는데. 항상 예외가 발생하고 예상이 깨지는 걸 보면 내가 우물 안에 개구리 같기도 하고 알 수 없는 미래가 나를 얼마나 자지러지게 할지 설렌다.
나의 선견력이 눈먼 비파 법사처럼 거리를 방황하며 풍유를 즐겨 주길.
오늘따라 유난히 하늘은 파랬다. 아마 나의 숨이 햇빛을 만나 울려 퍼지며 보이는 광색이라 그럴 것이다.
푸른빛 하늘 아래 구름 백사장.
풀빛 도로 안에 개나리 유도선.
그리고 잿빛 바위 위에 누룽지 땅끝호.
배가 왜 여기에 있을까. 예상치 못한 곳에 있는 땅끝호라는 배 한 척이 있었다. 땅끝호를 빤히 봤다. 부럽다. 이 배의 삶이 부러웠다. 하지만 과연 배도 그렇게 생각할까. 너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너의 탄생과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 젊음을 바다에서 전우와 함께 싸우고 노후를 육지에서 이렇게 멋을 뽐내고 있지 않은가. 나는 너의 삶과 다르게 살아가겠지만 열심히 광낸 자국 하나 정도는 남기고 떠날 테다.
3시간을 쉬지 않고 걸었다. 다리와 어깨에 통증이 오기 시작했다. 이제 좀 쉬어 볼까 근처에 있는 쉼터 같은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배낭을 내려놓고 신발과 양말을 벗어 햇볕에 널어놨다. 의자에 앉았다. 다리를 쫙 피고 가볍게 마사지를 했다.
물은 마시지 않았다. 한 번 마시면 계속 마시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최대한 참기로 했다. 그 전까지의 여정은 아마추어 같았는데 지금은 프로처럼 신속하게 움직여졌다. 아, 행군 때문이구나. 군대에서도 배운 게 있었네. 1시간 걸을 때마다 7분씩 쉬기로 했다. 21분 뒤, 버스정류장을 떠났다.
배가 고팠다. 점심은 밥을 먹어야겠다. 주변에 마을이 있나 검색을 해봤다. 가는 길에 현산면이라는 마을을 찾았다. 점심시간에 도착할 예정이라 그곳에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 쉬지 않고 2시간을 걸어 마을에 도착했다. 무릎과 발목이 그만 좀 걸어가라고 애원했다. 난 그들과 동지적 관계이기에 수렴했다.
마을 입구에 있는 슈퍼에서 간식으로 밤빵과 약과를 신속하게 샀다. 식당을 찾았다. 그런데 무슨 날이라도 되는지 죄다 문이 닫혀 있었다. 다행히 마을 끝자락에 있는 식당 하나는 장사를 하는 듯 보였다. 철로 된 낡은 미닫이 문을 밀고 들어갔다.
“저기요, 장사해요?”
“안 합니다~”
요리를 전혀 하지 않을 거 같이 생긴 아저씨가 모퉁이에서 얼굴을 쏘옥 내밀었다.
“네? 저기, 왜 다들 장사를 안 해요?”
“오늘 무슨 요일이에요?”
“일요일이요.”
아저씨는 고개를 끄덕끄덕 이셨다. 그리고 얼굴이 모퉁이로 쓰윽 들어갔다. 식당은 일요일에 쉬는 게 아니라 일요일이라서 장사를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이것도 지역 차이인가? 혹시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처럼 또 다른 세상이 있고 내가 그 세상에 인지하게 된 걸까? 태양을 봤다. 당연히 하나였다.
힘들고 배고프니 정신이 나가기 시작했나 보다. 더 이상은 걷는 건 무리였다. 내 몸은 휴식이 필요했다. 식당 맞은편에 있는 정자로 갔다. 그냥 뻗어 쓰러지라는 본능을 무시하고 젖은 텐트를 양지바른 곳에 피고 난 후 휴식을 취했다. 어쩔 수 없이 점심으로 아까 샀던 밤빵과 약과로 때웠다. 이걸 다 먹고 다시 마을 입구 슈퍼에 가기로 했다.
온몸이 아파 그대로 누워 버렸다. 과연 내가 오늘 해남읍까지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지 걱정됐다. 아마 힘들어서 자주 쉬려고 할 텐데 그걸 견딜 수 있을까? 아니면 몸에 무리로 병원에 갈 신세가 되면 어떻게 해야 하지? 머릿속에 부정에 부정을 쌓아 올려 갈 때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소방관 복장에 인상이 호불호가 갈리게 생긴 아저씨였다. 우리 아빠와 또래처럼 보였다. 양 손에는 커피가 든 일회용 종이컵들이 있었다.
“어디 가세요?”
“집이요.”
“네?”
순간 정적이 흘렀다. 표정이 “뭐지? 모자란 새끼인가?”라고 말하고 있었다. 도착지가 집이라 집이라고 말했을 뿐인데. 다시 목적지를 말했다.
“아, 안양까지 갑니다.”
“안양이 집이에요? 하하. 이거 받으세요. 근데 안양이 경기도에 있는 거 맞죠?”
“감사합니다. 맞아요. 서울 바로 아래 에요.”
“이야~ 멀리서도 오셨네. 땅끝마을에 출발하신 거죠? 혼자서 하시고 대단하십니다!”
하고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둘째가 내년에 군대를 간다고. 우리 아빠도 소방관이라고. 자기도 젊을 때 나처럼 국토대장정을 하고 싶었다고. 나는 어릴 때 아저씨처럼 그리고 아빠처럼 소방관을 하고 싶었다고. 그러다 보니 아까 쌓아 놨던 부정이 허물어져 있었다. 그 부정은 젠가가 아닌 지그소 퍼즐이었다.
어느덧 텐트는 다 말라 있었다.
“어이쿠, 제가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죠? 미안합니다. 오늘은 어디까지 가세요?”
“해남읍까지 가려고요.”
“해남이요? 오늘 많이 걸으시겠네. 그럼 어느 길로 가시는데요?”
“네? 어느 길이요? 길이 하나가 아닌가요?”
“아니죠. 여기서 좀 가다 보면 삼거리가 나오거든요? 거기서 왼쪽으로 가면 고속도로로 쭉~ 가는 게 있고 오른쪽으로 가면 구시저수지 방향으로 틀어서 가는 게 있습니다.”
“흠…… 어디로 가는 게 좋을까요?”
“고속도로 타는 게 빠르지만 차 때문에 공기가 너무 안 좋죠. 거기다 차들이 쌩 쌩 지나가서 엄청 위험합니다. 대신 구시저수지 방향으로 가면 공기 좋고 길고 좋죠! 거긴 눈도 좋아져요, 배경이 이뻐서요. 그런데 좀 돌아간다는 게 문제죠. 차 끌고 오셨으면 제가 바로 우회전하시라고 할 텐데, 걸으셔야 되니까 제가 쉽게 말하기가 어렵네요.”
내 몸은 왼쪽으로 가라고 소리 없는 아우성을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