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6일, 넷째 날
설마 했다. 하지만 경험했던 촉감이다. 이틀 전 바닷가에서 느꼈던 그 느낌. 온몸이 젖어 있었다. 습한 지형 때문에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지면에서 올라오는 습기와 텐트 안에 핫팩, 그리고 나의 체온 때문이었다. 텐트도 마찬가지로 다 젖어 있었다. 조심히 밖으로 나왔다.
찬란한 태양이 구름을 갈라 대지를 쬐고 있었다. 앞에 있던 건물들의 하얀색이 더욱 빛나게 반사됐다.
오늘의 아침식사는 뽀글이다. 지난번에 물이 부족해 생라면으로 먹었던 슬픈 교훈을 통해 이번에는 물을 충분히 아껴 놨었다. 끓인 물을 라면봉지에 넣고 나머지를 핫한 아메리카노로 만들었다. 정말 라면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왜 이렇게 맛있게 느껴지는지. 온몸이 젖은 채 뜨끈한 국물을 야외에서 먹으니 그런 듯했다. 음식의 맛은 미각뿐만 아니라 감정으로도 음미할 수 있나보다.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며 짐을 정리했다. 이제 갈 채비를 하는데 픽업트럭 한 대가 마을회관 안으로 들어왔다. 차는 5M 거리에 앞에서 멈췄다. 블랙 색상에 세차를 한지 얼마 안 됐는지 상당히 깨끗했다. 하지만 타이어는 흙 범벅이었다. 동네 사람일 거다. 혹시 내가 더럽게 사용했나 텐트 쳤던 장소를 봤다. 깨끗했다. 머리도 세차를 한 것처럼 광나는 정수리를 가진 중년의 아저씨가 차에서 내렸다. 하지만 나에게는 관심이 없는지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마을회관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바로 나왔다. 그리고 나에게 다가오더니 오른손을 힘껏 올리며 말했다.
“오우,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죄송합니다. 함부로 써 서요. 문에 있는 전화번호에 연락해봤는데 없는 번호라고 하더라고요. 국토대장정 중인데…… 마을이 참 좋네요?”
“아이고, 감사합니다. 저는 여기 이장됩니다. 잠깐 들린 건데 혹시 화장실 쓰실 거면 지금 쓰실래요? 바로 문 잠그고 가야 되는데.”
“아닙니다. 갈 길이 멀어서요. 감사합니다.”
이미 볼일을 봤다고 말하기 애매해서 이유 같지 않은 변명을 대버렸다. 부랴부랴 길을 나섰다. 어제는 30.7km를 걸었다. 그렇다면 해남에서 나주까지 총거리가 63.7km였으니 33km가 남아야 되는데 37km였다. 장거리일 경우 걸어가는 거리는 검색조차 안돼서 차 경로로 검색한 게 이유였다. 어느 정도 오차범위는 인지하고 길을 정해야 했다. 아마 오늘 걷는 거리도 37km가 아닐 것이다. 운이 나쁘면 40km를 넘게 걸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30km 대도 힘들어 죽겠는데 40km대라니. 점심식사로 든든하게 밥을 먹어 야지. 그래서 밥심으로 나주까지 힘차게 걸어야지.
배가 아팠다. 윗배가 아닌 아랫배가 아픈 걸 보아 병원 대신 화장실에서 진료를 받으면 나을 병이다. 공용화장실을 찾아봤다. 정말 급하면 숲 속으로 들어가 한 마리의 짐승이 되어 그냥 지리면 되지만 아직 이성이 몸을 지배하고 있었다. 아무리 머리를 좌우로 돌려도 공용화장실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시골치곤 큰 교회가 보였다. 하지만 오늘은 슬픈 화요일이었다. 문을 열려 있을 리 없다. 그래서 포기하고 길을 이어가는데 한 아주머니가 교회로 향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멈춰서 멍하니 봤다. 아주머니는 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교회는 언제나 문이 열려 있구나. 나 같은 사람을 위해. 안도감에 괄약근이 풀릴 뻔했다. 교회 안으로 들어가 사람을 찾았다. 사람 소리가 나는 곳으로 가봤다. 교회 식당에서 아줌마들이 분주히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 김장이었다.
“안녕하세요. 혹시 화장실 좀 써도 될까요?”
“네~ 쓰세요.”
“감사합니다.”
배낭을 내려놓고 물티슈를 꺼냈다. 그저 휴지만으로 항문의 이물질을 해결하기엔 내 결벽증이 참질 못한다. 만일 그저 눈감고 휴지로만 해결한다면 총배설강(總排泄腔)만도 못한 기관이 된다. 볼일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햇살이 쨍쨍하니 젖은 텐트를 말리기 좋아 보였다. 점심을 해결할 동네는 오후 1시 이후에 도착할 예정이라 여기서 쉴 겸 텐트와 침낭을 말렸다. 불안해 보이는 배낭 끈을 살살 달래며 풀었다. 텐트를 교회 앞 계단에서 말리고 침낭은 빨랫줄 같은 긴 것에 널었다. 날씨가 좋아 생각보다 빨리 말랐다. 다시 끈들을 두 손으로 빌며 묶었다.
점심을 해결할 마을에 도착했다. 제법 큰 동네였다. 음식점들이 꽤 많았다. 여기서 점심을 해결하고 간식거리까지 사기로 했다. 가장 구미가 땅기는 중국집으로 들어갔다. 점심시간이 지났는데 사람이 많았다. 혹시 우연이 들린 맛집일까 기대됐다. 밥심이 필요해 자장밥을 시켰다. 집에서 중화요리를 시키면 항상 탕수육을 주문했는데 그것마저 먹으면 배불러서 걷기 힘들 거 같았다. 자장밥이 나왔다. 역시 짬뽕국물은 덤이다.
밥 위에 노른자를 살살 터뜨려 밥과 자장을 듬뿍 펐다. 그리고 내 입에 넣었다. 수저와 이빨이 부딪치며 경쾌한 소리가 났다. 사르르 자장소스가 입 안에서 녹아내리며 혀 위에 남겨진 돼지고기를 씹었다. 후춧가루와 밑간을 한 걸 보아 정성이 들어갔다. 혹시나 혀가 느끼해질까 봐 급하게 짬뽕국물이 담긴 그릇을 오른손으로 터억 잡아서 두 모금을 연속으로 마셨다. 하지만 이것이 실수가 되어 버렸다. 마시는 순간 깨달았다. 이 집은 짬뽕이다. 국물이 유명한 곳이다. 난 무례하게도 그 값진 국물을 함부로 들이켰다. 주변 테이블 음식을 봤다. 역시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짬뽕을 먹고 있었다. 귀한 짬뽕국물을 아끼고 아껴 먹었다. 물론 다 먹고 더 달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이 짬뽕국물의 가치는 추락하고 말 것이다. 식사가 끝나고 내 테이블에는 빈 그릇만이 남았다. 애피타이저로 자판기 커피를 마셨다.
든든한 배를 한 번 쓰다듬으며 출발했다. 뒤에서 무언가 툭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몸이 가벼워졌다. 불안한 느낌을 못 지운 채 뒤를 돌아봤다. 거대한 내 텐트가 대자로 뻗어 있었다. 더 이상은 못 가겠다고. 배낭에 뜯어진 끈은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마치 잘 가라고 손을 흔드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