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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용호 May 10. 2019

1. 듣고 싶지 않던 이야기.

 대학생 시절, 집에 와보니 엄마가 없었다. 이상했다. 항상 미싱을 돌리거나 드라마를 보고 있는데 집순이인 엄마가 집에 없으니 의아했다. 엄마를 기다렸다. 파란 하늘이 붉은 노을이 되고 어느덧 내 맘과 같은 새까만 밤이 되었다. 하지만 엄마는 집에 오지 않았다.



 전화를 걸었다. 엄마는 한참을 안 받다가 3번째에 겨우 받았다. 여보세요. 아무 말도 없었다. 수화기에는 거친 숨소리를 구겨 넣은 듯한 신음만이 들려왔다. 엄마 어디야. 그제야 엄마는 그냥 집 근처에 있다고 신경 쓰지 말라며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그때는 그냥 그런가 싶었다.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으니까. 하지만 그 날 이후로 엄마가 집에 없는 날이 많아졌고 나의 의구심은 커져갔다.



 모두가 잠든 밤이었다. 잠에서 깬 나는 화장실을 가다가 안방에서 작은 대화 소리를 듣고 발걸음을 멈췄다. 이 시간에 무슨 대화를 하길래 안 자고 있을까. 안방 문 벌어진 작은 틈 사이로 내 눈과 귀를 갔다 댔다. 거기에는 엄마가 왜 집을 비우는지에 대한 이유가 있었다. 엄마는 말했다. 오른손에 힘이 빠지고 있다고. 모를 병에 걸린 거 같다고. 아빠에게 어떻게 해야 하냐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다 어린 소녀처럼 두 손으로 얼굴을 폭 감싼 채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는 병을 찾아다니느라 집을 비우고 있었다. 나는 안방 문을 열고 달려가 엄마를 안아주며 위로해주고 싶었다. 괜찮아. 걱정 마. 우리가 있잖아. 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엄마가 나에게 직접 말해주기 전까진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다음 날, 고생 끝에 들어간 학생회를 그만뒀다. 곧 있으면 매니저로 승진시켜준다던 유명 빵집 일도 그만두기로 했다. 양손에 허공을 움켜쥐고 집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엄마는 집에서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집안 살림을 시작했다.



 설거지, 빨래, 청소 같은 집안일을 내가 언제 했던가. 생각해보니 매년 딱 2번씩 했었다. 4월 8일 어버이 날과 8월 1일 엄마의 생일날. 이제 이걸 매일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여간 귀찮을 수가 없었다. 학생회실이나 빵집에서 일할 때는 이런 감정이 들지 않았는데. 그것들은 대가가 돌아왔었다. 돈과 명예라는 보이는 결정체로 말이다. 집안일은 그러지 않았다.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집안일 중 가장 하기 싫었던 건 바로 화장실 휴지통이었다. 평생을 아무 생각 없이 휴지를 버렸었다. 이렇게 더러운 걸 어떻게 매번 치울까. 엄마는 항상 했다. 단 한 번의 투정도 없이. 내가 집안일을 하면서 엄마가 가장 기뻐했던 순간도 화장실 휴지통이 비워졌을 때였다. 그때 집안일을 하면서 처음으로 대가를 얻었다. 학생회나 빵집에서 얻을 수 없는 보이지 않는 비정체로 말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엄마의 외출은 더욱 잦아졌고 집에는 흰 종이들이 쌓여갔다. 아무도 없을 때 몰래 봤다. 수많은 병원에서 받은 진단 결과였다. 병명란에는 모르거나 알 수 없다는 내용들 뿐이었다. 병을 알아야 어떻게 치료를 하든 할 텐데. 엄마는 누구에게도 같이 가지고 말하지 못한 채 홀로 병을 찾아다녔다. 불안한 마음을 곱씹으며. 아무도 엄마의 곁에 없을 때 두려움과 외로움만이 엄마의 곁에 있었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자 엄마는 나에게 할 말이 있다며 안방으로 데리고 왔다. 그리고 말했다. 병이 있다고. 병명은 ‘진동 증후군’인 거 같다고. 미싱일을 할 때 진동으로 생긴 직업병일 수 있다고. 하지만. 잘하면. 아니 어쩌면 희귀병인 ‘근위축성 측색 경화증’이라는 난생처음 듣는 병일 수도 있다고 했다. 만약 후자의 병이라면 2년 안에 죽는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마치 형장에서 자신이 매달릴 십자고상을 높이 들어달라고 말하는 잔 다르크처럼. 엄마는 아빠에게 연약한 여자이지만 나에게는 강인한 엄마로 보이고 싶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던 병명을 한양대에서 알려줬다. '진동 증후군'이 아니었다. 살면서 두 번째로 듣는 ‘근위축성 측색 경화증’이었다. 이 병의 또 다른 이름은 ‘루게릭병’이다.



 엄마가 루게릭병에 걸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슬프거나 괴롭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엄마가 나에게 보여준 담담했던 모습처럼 나 또한 비슷하게 덤덤했다. 머리로는 받아 들었지만 마음으로는 인식되지 않았던 것이다.



 빵집에서 하루만 일해달라고 부탁해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잠시 화장실에 갔을 때 학교 선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선배는 요즘 내가 이상해서 걱정이 된다며 전화했다고 말했다. 처음에 별일 없다고 말했지만 눈치 빠른 선배는 꼬치꼬치 캐물었다. 결국에 나는 엄마가 아프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그 말을 끝까지 할 수 없었다. 목이 매여왔다. 숨이 막히고 얼굴에 경련이 일어나며 끓어 오른 용암처럼 눈물이 터져버렸다. 나 홀로 불 꺼진 화장실에서 쪼그린 채 하염없이 울었다. 그제야 마음으로 인식됐다. 엄마가 2년 안에 죽는다는 걸.



 밤하늘에 잔뜩 낀 구름 때문에 달이 보이지 않던 날, 아빠는 나에게 산책을 가자고 권했다. 살면서 처음으로 아빠와 산책을 나갔다. 서로 입이 없는 사람처럼 아무 말 없이 걸었다. 그러다 아빠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엄마가 고칠 수 없는 병에 걸렸는데 어떤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한 숨을 내쉬었다. 나는 아빠에게 말했다. 아이에 해주지 말 거면 해주지 말고 해 줄 거라면 전재산을 털어서라도 해줘요. 나는 집안이 거덜 나도 상관없어요. 엄마가 좋아하는 개떡이나 사서 집에 가요. 아빠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 돌아오니 엄마는 창고에 매달린 십자가 아래에서 기도를 하고 있었다. 간절하게 눈물을 쏟아내며.



 나는 종교가 없지만 그날 밤 믿지도 않는 신에게 빌었다.





 “오늘은 하기 싫다. 감정을 말로 다 할 수 있겠나. 알아듣지도 못하는데.  다만, 하나님께 속 사귈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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