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용호 May 13. 2019

2. 드리워진 트라우마.

 대학 새내기 시절이었다. 친구들과 신체검사를 받으러 병무청에 갔다. 신체검사를 받으며 친구들끼리 군대 면제받는 방법에 대해 얘기했다. 분명 누군가 면제받으려고 의사 앞에서 바지를 내리고 똥을 쌀 거라고. 그러면 넌 그 옆에서 싼 똥을 맛있게 먹으라고. 그러면 면제가 된다며 모두가 깔깔깔 웃었다. 하지만 나는 웃을 수 없었다.



 나는 눈이 나빴다. 안경 없이 보는 세상은 사일런트 힐과 같은 뿌연 안갯속 같았다. 그리고 남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 뚱뚱했다. 한마디로 고도비만이었다. 나는 가만히만 있어도 면제였다. 하지만 군대에 가고 싶었다. 남들처럼 멋지게 전역하고 싶었다. 



 병무청을 가기 전날, 시력판을 전부 외웠다. 삼일 동안 물만 마시고 굶었다. 이런 노력으로 나는 겨우 현역 판정이 났다. 그제야 웃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몰랐다. 엄마가 2년 안에 죽는 루게릭병에 걸릴 줄. 내가 입대를 하고 전역하기 전에 엄마는 죽을 거라고 모두가 확신했다.



 입대 날, 훈련소에서 엄마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냥 전역하면 개떡이나 만들어 먹자고 했다. 엄마는 알았다며 몸조심하라고 했다. 나는 운전병으로 입대해서 자대 배치를 받기 전 1달 동안 야수교에서 운전 훈련을 가졌다. 그리고 야수교에서 마지막 주에 외박을 나갔다.



 엄마를 만났다. 2달 만이었다. 엄마의 오른손이 많이 약해져 있었다.  나를 위해 음식을 준비했다며 홀로 주방에 갔다. 나도 따라갔다. 엄마는 오른손잡이였는데 왼손을 사용해 요리했다. 보는 내내 마음이 아려왔지만 일부러 신나는 척 배고프다며 빨리 밥해달라고 어리광을 부렸다. 후식으로 참기름이 덕지덕지 발라진 개떡을 먹었다. 다음 날 아침에 근처 공원에서 다 같이 공놀이를 했다. 축구도, 피구도 아닌 아무 규칙 없는 공놀이였다.



 자대 배치를 받았다. 열심히 해야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생활관에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뺨을 맞고 쓰러졌다. 다른 중대에서 우리 중대를 일명 구타 중대라고 불렀다. 군생활은 정말 힘들었다. 집에 전화할 때마다 힘들어 죽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이 응어리를 풀고 싶었다. 엄마는 내게 혹시 무슨 힘든 일이라도 있냐고 물었다. 나는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다. 엄마. 부대 사람들이 다들 천사같이 착해. 난 잘 지내고 있으니까 엄마 걱정이나 해. 수화기를 내려놓을 때 모든 걸 체념했다. 



 유격훈련 중 일병이 됐다. 훈련이 끝나고 바로 집에 전화했다. 아들이 그 지옥 같은 유격훈련을 받고 왔다고. 다친데 하나 없이 잘했다고. 칭찬을 듣고 싶었다. 엄마가 전화를 받았다. 울고 있었다. 그리고 엄마는 말했다. 살려 달라고. 죽고 싶지 않다고. 애처로운 소리로 부르짖었다. 내 귀가 먹먹해졌다. 아빠가 급하게 전화기를 뺐어 나에게 뭐라고 몇 마디를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시야가 늘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세상이 나 대신 술에 취해 준 것 같았다. 정신이 나가버렸다. 잦은 실수가 많아졌고 군생활은 지옥에서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누군가 나를 불러도 심장이 털썩 내려앉았다. 행정반에서 울리는 전화 벨소리에도 다리 힘이 풀렸다. 누군가 엄마의 죽음을 전할까 봐 무서웠다.



 휴가를 나왔을 때 왜 엄마가 그토록 힘들어하는지 알게 되었다. 나에게는 누나 한 명이 있다. 어릴 적부터 이기적인 성격이라 나와 대화도 하지 않는 사이였다. 엄마는 이제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이 많아졌다. 누나의 손길이 반드시 필요했다. 때마침 누나도 대학을 졸업한 상태였다.



 하지만 누나는 엄마의 병을 이해하지 못했다. 왜 자신이 엄마를 돌봐야 하는지, 왜 취직하고 독립할 수 없는지. 매일 따지고 화를 내고 있었다. 군대에 간 걸 후회했다. 그때, 병무청에서 가만히만 있었어도 엄마는 행복해지지 않았을까. 수도 없이 생각했다. 



 휴가를 나올 때마다 엄마와 누나의 싸움이 잦아졌다. 항상 강인했던 엄마는 점점 몸과 마음이 약해져 갔다. 그러다 누나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저런 누나라도 없으면 엄마는 살 수 없게 되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엄마한테 말했다. 엄마가 뭔데 눈치를 보는 거야. 평생 우릴 키워줬으면 이 정도 시키는 건 당연한 거 아냐? 그리고 앞으로 시키면 더 시키게 될 텐데 그땐 어떻게 하려고 그래?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말을 이어갔다. 이건 엄마가 기준을 잡아야 해. 시킬 때 미안해하지 말고 당연한 것처럼 시켜. 안 하면 할 때까지 시키고 화내. 그래야 시키는 게 당연해져. 안 그러면 죽을 때까지 자식들 눈치 보다가 죽을 텐데 정말 그러다가 죽고 싶어? 엄마는 무슨 말인지 알겠다고 했다.



 일병 말에 휴가를 나왔다. 주말에 엄마와 싸웠다. 나는 하기 싫다고 짜증을 냈고 엄마를 하라고 화를 냈다. 결국에 엄마가 시키는 데로 했다. 나중에 화가 풀리자 엄마한테 가서 잘했다고, 앞으로도 그렇게 하라고 했다. 엄마는 미소를 지었다. 엄마는 더 이상 눈치를 보지 않았다.



 상병 때 외박을 나왔다. 엄마의 오른손은 이제 움직이지 않았다. 강제로 왼손잡이가 되었다. 하지만 왼손도 많이 약해져 있었다. 부대로 돌아가기 전, 가족끼리 닭갈비를 먹으러 갔다. 그런데 엄마는 차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다. 식당에서 손을 못 움직이는 모습이 창피하다는 게 이유였다. 하는 수 없이 엄마를 차에 두고 외식을 했다. 평소에 좋아하던 닭갈비였지만 몇 점 먹지도 못하고 나왔다. 이날 후로 우리 가족은 외식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이등병 때부터 일요일마다 교회를 갔었다. 한주도 빠짐없이 엄마를 위해 절실하게 기도했다. 그러다 어느새 대대 군종이 되어 있었다. 엄마에게 이 소식을 전했을 때 가장 기뻐했다. 엄마는 정말 하나님이 기적을 보여주려고 하는 거 같다고 했다. 기적이란 단어가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병장이 되고 전역날이 가까워질수록 불안한 마음이 커져갔다. 그러다 불면증까지 생겼다. 자기 전, 어둠 속에서 혼잣말을 하곤 했다. 전역할 때까지 만이라도 버텨 달라고. 죽지 말아 달라고. 이 말만 반복했다. 



 마침내 전역했다. 모두의 확신을 깨고 2년 안에 죽는다던 엄마는 살아 있었다. 하지만 몸은 많이 약해져 있었다. 엄마의 양손은 미동조차 없었다. 이제 발을 절기 시작했다. 



 엄마가 만든 개떡을 먹고 싶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럴 일은 없다.





 “내 딸은 화나게 하는 재주가 있다. 화나게 해 놓고 꼭 밥을 주려고 한다. 눈물과 함께 밥을 먹기는 너무 싫다. 그래서 꼴을 많이 부리게 된다. 지도 속상하겠지. 생각하면 불쌍하다.”

이전 01화 1. 듣고 싶지 않던 이야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