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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용호 May 19. 2019

3. 내려 놓음.

 전역하기 전, 아빠 혼자서 면회를 왔었다. 종로에서 유명한 매운 족발을 사들고 온 아빠는 전역하면 뭘 할 거냐고 물어봤다. 당연히 엄마를 모실 생각이었다. 하지만 나의 답변을 듣지도 않은 채 아빠는 나에게 소방관을 권유했다. 달갑게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선택권은 없었다. 아빠 혼자서 버는 돈으로 우리 가족이 생존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엄마를 간호하는 건 나보단 같은 여자인 누나가 더 낫다는 게 나를 제외한 가족의 의견이었다. 엄마를 위해 정해져 버린 길이었다. 



 마지막 휴가 때 노량진에 가서 학원을 알아봤다. 전역 후, 바로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학원비는 군대에서 아끼고 아낀 월급을 사용했다. 학원을 다니면서 돈을 아끼려고 점심과 저녁을 굶었다. 학창 시절에 이렇게 공부했으면 서울대를 가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미친 듯이 했다. 자는 시간을 빼고 항상 공부만 했다. 최대한 빨리 합격하는 게 내게 있어서 최선의 방법이었다. 



 2개월이 지나고 학원 수강이 끝났다. 집에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 재수강을 하지 않았다. 집 근처 도서관에서 혼자 공부하기 시작했다. 도서관이 집에서 가까워 끼니는 집에서 챙겨 먹었다. 노량진을 다닐 때는 잘 몰랐는데 엄마에게서 심한 우울증이라는 잡초가 자라고 있었다. 엄마는 죽어가는데 도서관에서 공부를 한다는 게 이질적여 보였다. 딜레마가 생겼다. 공부를 계속해야 하는가, 아니면 포기하고 엄마를 모셔야 하는가. 



 딜레마는 녹슨 나사가 되어 내 머리를 조여왔다. 엄마에게 농담처럼 물어봤다. 엄마. 공부 그만두고 엄마랑 있을까? 그러자 엄마는 녹음을 하나 하자고 했다. 공부가 잘 안될 때마다 이걸 들으라며 응원의 메시지를 남겼다. 엄마는 공부하러 가는 나에게 항상 행복해 보이는 미소를 보여줬다. 간혹 중간에 집에 가면 엄마가 숨겨둔 눈물을 볼 수 있었다.



 3개월이 지났을 때, 첫 번째 시험을 봤다. 시험 삼아 한 번 보는 거라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다. 영어를 빼고 모두 합격점에 도달해 있었다. 가능성이 충분했다. 하지만 한편으론 불가능했다면 엄마와 함께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반년 뒤, 다시 시험을 봤다. 이번 시험은 진짜였다. 이 날을 위해 나는 공부를 미친 듯이 했다. 열심히 문제를 풀었다. 그리고 마킹을 하나도 하지 않았다. 가채점을 하기 위해 따로 답을 적어 놨다. 집에 가서 미리 만들어둔 어두운 표정을 했다. 



시험 결과 발표날, 부모님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소방관은 힘들 거 같아요. 죄송해요. 아빠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는 그동안 고생했다고 위로해줬다. 내방으로 들어갔다. 하루도 빠짐없이 매고 다녔던 가방에서 가채점을 한 종이를 꺼냈다. 확인도 하지 않은 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눈물이 차 올랐다.



 후회는 없었다. 다만 초등학생 때부터 장래희망 란에 적었던 소방관이라는 글자를 지우고 싶었다. 이제 쓸 일 없는 지우개로 그어 버리고 싶었다. 안 그러면 눈물이 멈출 거 같지 않았다.





 “보통 사람들은 평생 뜨거운 눈물이 유행가 가사에만 있는 줄 알지만 사실 그렇게 사람 몸속에 있는 걸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요즘은 울지 않지만 또 울어도 그렇게 뜨겁지 않다. 처음에는 얼마나 뜨거운지 눈꺼풀이 녹아내릴 거 같이 많이도 흘렸었다. 걸어가면서도 또 차 안에서도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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