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식이 시작됐다. 수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다. 부산에 사는 엄마의 먼 친척들까지 왔다.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장례식 내내 울기만 했다.
장례식에 온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를 욕했다. 누나는 엄마를 저렇게 모시는데 아들 새끼는 집구석에서 뭘 하는 거냐고. 귀가 간지럽다 못해 피가 나는 거 같았다. 누나와 나를 보는 시선마저 극과 극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장례식이 끝나고 셋밖에 안 남은 우리 가족은 8년 만에 엄마의 고향을 다녀왔다. 기념이라 치고 엄마가 살던 집 앞에서 사진 한 장을 찍었다. 다 같이 웃으면서 찍었는데 사진을 보니 이런 울상이 없었다. 그때 셋이서 어렵게나마 웃었다.
오랜만에 와서 그런지 엄마의 고향은 많이 바뀌어 있었다. 엄마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여름캠프가 자리를 잡았다. 유통기한 지난 음식만 팔던 구멍가게도 사라지고 편의점이 들어섰다. 이렇게 세상은 무언가가 사라지면 다른 무언가로 채워진다. 그러면 세상을 떠난 우리 엄마를 대신할 이 빈자리는 무엇으로 채워질까.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을 텐데.
집에 돌아오는 길에 휴게소를 들렸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잠을 깨우고 있었다. 누나가 장례식에서 친구한테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장례식에 온 사람들이 네 욕을 하는 거 같았다고. 나는 누나에게 그건 어쩔 수 없는 거라고 말했다. 나는 남자고 집에 누나가 있으니 당연히 나는 엄마 병간호를 안 할 거라고 생각하는 게 당연하다고 말했다. 누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들이 왜 네 욕을 하냐며 울었다. 넌 억울하지도 않냐고. 너 없었으면 나는 힘들어서 자살했을 거라고 누나가 말했다. 나는 억울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 잊혀질 거라고 누나를 위로해줬다.
그 후 나는 호주로 떠났다.
호주에서 좋은 경관만 보면 눈물이 났다. 맛있는 걸 먹어도, 좋은 사람들을 만나도, 눈물은 멈출 생각을 안 했다. 이런 세상을 보지 못한 채 떠난 엄마를 생각하니 마음이 찢어질 거 같았다. 내가 항상 울자 외국인 친구가 내게 말했다. 걱정 말라고. 엄마의 육체는 죽었지만 영혼은 네 마음 안에서 살아간다고.
우리는 엄마에게 최선을 다했다. 불타는 20대 청춘을 다 바쳤다. 엄마가 3~40대 청춘을 우리에게 바친 것처럼. 하지만 여전히 후회가 남는다. 조금 더 잘할 걸. 조금 더 행복하게 만들어 줄 걸. 엄마에게 잘 해준 기억을 지운 채 아쉬운 마음만 자리를 잡았다.
남은 인생을 엄마를 위해 살아가려고 한다. 엄마의 어릴 적 꿈이었던 작가가 되고 싶어 졌다. 엄마가 좋아하는 자연경관을 찾아다니며 사진으로 그리고 마음 안으로 남기기로 했다. 가끔 고민거리가 생길 때가 있다. 그때마다 엄마라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한다. 그러면 쉽게 답이 나왔다.
사랑하는 우리 엄마.
항상 지켜 봐주길.
개떡은 조금씩만 먹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