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 탄생 140주년 특별전

<한국에서의 학살>을 마주하며

by 안신영

지난번 전시에 앞서 피카소전 안내 글을 발행했을 때부터 마음에 걸리던 작품이 있었다.
그동안 우리나라에서 피카소 전시가 여러 차례 있었음에도 단 한 번도 오지 못했던 그림, **〈한국에서의 학살〉**이었다. 이번 전시를 계기로 이 작품이 처음으로 한국에 온다는 소식은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 그림을 둘러싼 여러 해석과 논란을 접하며, 과연 내가 제대로 알고 글을 썼는지, 혹시 중요한 것을 놓친 것은 없는지 마음이 무거워졌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의 책임감이 오히려 부담이 되어, 이 작품만큼은 반드시 직접 보고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전시장으로 향했다. 돌이켜보면, 전시를 기다리기보다 스스로를 점검하러 간 시간이었다.

*다음 캡처

〈한국에서의 학살〉은 맨 마지막, 7 전시실에서 관람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궁금증과 긴장감이 자연스럽게 그 공간으로 사람들을 몰아넣었다. 그림이 발표된 지 70년이 지나서야 한국에 도착한 작품.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그림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림 앞에 섰을 때 가장 먼저 든 감정은 혼란이었다.
가해자는 분명하지 않고, 피해자는 무방비의 양민들이다. 이것이 한국전쟁의 특정 사건을 재현한 그림인가, 아니면 전쟁이라는 이름 아래 어디에서나 반복되는 비극의 한 장면인가. 분명한 것은, 전쟁이라는 상황 속에서 한 마을이 겪었을 참혹함이 보는 이를 압도한다는 사실이었다.

<게르니카> 다음 캡처.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한 <게르니카 Guernica>는 전쟁의 폭력을 고발하는 미술사의 가장 상징적 작품이 되었고 그의 손끝에서 탄생한 이미지의 힘만으로 동시대의 아픔과 소통의 장을 열었으며 그림이라는 조형 언어를 통해 인간의 부조리를 서슴없이 고발했다. 피카소라는 대가의 위대함이 여기서 빛난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 갈 무렵 피카소는 <게르니카>에 버금가는 또 하나의 반전 작품을 제작한다. 뉴욕 현대 미술관에 소장된 작품 <시체 구덩이 Le Chrnir>이다. <게르니카>와 같은 무채색의 단일 톤으로 주제가 갖는 무게감을 드라마틱한 분위기로 연출한 이 그림은 2차 세계대전 동안에 독일 나치 정권이 저지른 만행 유대인 학살을 고발하는 작품이다. 그리고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한 이듬해 피카소는 한국 근대사의 최대 사건인 한국 전쟁을 소재로 <한국에서의 학살 Massacre en Cor'ee>이라 명명한 작품을 완성한다.

<시체 구덩이> 다음 캡처.

<게르니카> <시체 구덩이>이와 더불어 피카소의 3대 반전 작품으로 여겨지는 이 작품은 당시 팽배했던 이데올로기적 논쟁을 떠나 앞선 두 작품과 같은 맥락에서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무력으로 자행한 양민 학살을 소재로 하고 있다.

1952년 5월 파리 살롱전에서 처음 발표된 후 무려 70년 만에 한국 땅을 밟은 그림 <한국에서의 학살>이다. 제목 때문에 3만 5천여 명의 양민 학살이라는 초유의 사건을 다뤘다는 그림이라서 많은 한국인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그림이기도 하다.

사실 이 그림은 작품 제목을 제외하면 그림에 등장하는 배경이나 인물은 한국 전쟁의 실상과는 거리가 멀다. 제목과 달리 학살의 주체가 누구든 간에 전쟁 폭력으로 희생되는 무고한 양민 학살에 대한 범 인류적인 고발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사진작가 도라마르는 피카소의 연인

위대한 화가로 칭송받는 피카소는 입체주의의 발명이 서양미술사에서 그가 이룩한 가장 위대한 업적이기도 하다. 또 작품의 존재 이유와 의미를 정립하고 예술 작품을 현실과 소통의 도구로 이끌어 낸 피카소의 업적 또한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반전反戰 예술의 상징이 된 작품 <게르니카>가 있다. 1937년 5월 피카소는 파리 만국 박람회 스페인관에 전시될 8m에 달하는 대작 <게르니카>를 완성한다. 스페인 내전 중에 일어 난 양민 학살을 주제로 한 이 작품은 무고한 양민들에게 자행된 무자비한 전쟁 폭력을 고발하는 피카소의 반전 작품의 효시를 이루는 작품이다. 스페인 내전은 인민 전선의 정부군과 프랑코 군부가 이끄는 반군 사이의 4년에 걸친 내전으로 1939년 프랑코 군부의 승리로 끝이 났다.

스페인 내전 동안에 독일 나치 정권과 아탈리아 파시스트 정권의 지원을 받아 프랑코 군부는 독일 콘도로 항공대와 이탈리아 항공대를 동원하여 1937년 4월 16일 스페인 서북부 바스크 지방의 도시 게르니카를 폭격한다. 인구 7천 명의 작은 도시를 불바다로 만들고 수천 명의 사상자를 낸 이 비극은 최초의 민간인 폭력 사건이자 무고한 시민들에 대한 대학살로 기록된 사건이다.

피카소는 스페인 정부의 요청으로 만국 박람회 스페인관을 대표할 작품을 고심하던 중에 게르니카의 소식을 전해 듣고 조국의 비극을 작품으로 완성하고 난 직후

"그림이란 집안을 장식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이것은 적에 대한 공격과 방어의 전쟁 도구이다."라고 피카소는 말했다.

루벤스의 헤롯왕의 <유아 학살> 다음 캡처.

양민 학살의 그림은 구약 성서 출애굽기에 나오는 헤롯왕이 예수 탄생에 즈음하여 2살 이하의 베들레헴 지역 아이를 말살하라는 형상화한 16세기 플랑드르 화가 피터 브루겔(Piter Bruegel)을 비롯해 루벤스(Rubens)와 푸생(Poussin)의 작품에 등장한다.

양민 학살의 실제적 사건을 그린 대표작은 1608년 스페인의 궁정화가 프린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1746-1828)의 <마드리드 1808년 5월 3일>이다 스페인을 점령한 나폴레옹 군대가 마드리드 시민의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저지른 시민 학살을 소재로 그린 대작으로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에 구도적으로 모티브를 제공한 작품이다.

프란시스코 고야 <마드리드 1808년 5월 3일> 다음 캡처.

6·25 전쟁을 겪으며 이 땅에서는 수많은 무고한 양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기록으로 남은 굵직한 사건들뿐 아니라, 이름조차 불리지 못한 죽음과 상처가 얼마나 많았을지 가늠하기 어렵다. 그 시대를 직접 겪었거나, 가족의 이야기로 전쟁을 이어받은 사람들은 지금도 마음 한편에 지워지지 않는 아픔을 안고 살아간다.

그럼에도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과거의 사건으로 남아 있는 동안, 아프가니스탄과 미얀마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삶의 터전이 무너지고 사람들이 희생되고 있다. 화면 속 그림을 바라보면서, 이 비극이 특정한 시대나 장소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이 더욱 선명해졌다.

〈한국에서의 학살〉은 그래서 한 나라의 전쟁을 묘사한 그림이라기보다, 전쟁이라는 이름 아래 반복되어 온 인간의 잔혹한 얼굴을 드러낸 작품처럼 느껴진다. 피카소는 이 그림을 통해 폭력에 맞서 싸우는 방법으로 또 다른 폭력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는 예술이라는 언어로, 비폭력과 평화의 메시지를 인류에게 강하게 던졌다.

전시장을 나오며 확신하게 된다.
이 그림은 이해되기 위해 그려진 것이 아니라, 외면하지 말라고 존재하는 작품이라는 것을.

발로리스 예배당에서 <전쟁과 평화> 벽화를 제작하는 피카소.

원로 소설가 황석영 씨는 단연코 기독교인들이 양민을 학살했다고 단언을 하고 소설을 썼다. 최근 펴낸 "손님"이란 소설에서 기독교인들이 양민을 학살한 지옥도라며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미군이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끼리 그랬는데 특히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했다는 거죠. 굉장히 거기에 충격을 받았어요. 아 이건 우리끼리 한 짓이구나"

"같은 마을에서 밥 먹고 경조사 되면 같이 슬퍼하고 기뻐하고 그러던 사람들이 그 50일의 짧은 기간에 서로 악귀처럼 변해서 죽인 거야."

왜 그랬을까?

무슨 철천지 원수가 졌다고 서로 죽이며 수만 명이 학살되었는지 이해가 안 된다. 타임슬립이라도 해서 과거의 신천으로 가서 상황을 살펴 그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게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photo by young(피카소 작업 사진은 도록 캡처)

참고;PICASSO Into the Myth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