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를 원한다면 포기해야 하는 것

초월과 의미

by 반루이 Van Louii
DGrADyoV0AAN9a3.jpg René Magritte, Cat in a Hat

[그림 앞에서]


톨스토이 : 고양이 한 마리가 귀엽게 있군


알베르 카뮈 : 정말 귀엽네요. 게다가 고양이들은 저렇게 좁은 공간 안에 있는 걸 좋아하죠


톨스토이 : 그렇지. 아마 저 고양이 모르긴 몰라도 행복해하고 있을 거야. 그런데 우리 재미있는 생각을 한번 해보세


알베르 카뮈 : 무슨 생각 말입니까?


톨스토이 : 저 고양이는 왜 저 그림에 자기가 그려져 있는지 알고 있을까?


알베르 카뮈 : 모르지 않을까요? 오히려 황당해하겠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림에 자신이 그려져 버렸으니까요.


톨스토이 : 아무래도 그렇겠지? 자 그럼 고양이가 있는 저 모자와 그아래 받침이 어딘가에 줄로 묶여있다고 생각해보세


알베르 카뮈 : 저기는 하늘이니까 저절로 떠있을 수는 없겠죠. 그렇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톨스토이 : 근데 말이야.. 그 줄이 매듭이 단단하지가 못해서 서서히 몇 가닥씩 풀어지고 있고 고양이가 그것을 보았다면 어떨까?


알베르 카뮈 : 곧 하늘에서 추락한다는 걸 알고 겁에 질리겠죠.


톨스토이 : 이게 왜 이 이야기를 하는지 아는가?



[완전한 자유와 완전한 무의미함]


왜 사는지에 대한 질문이 꽤 어려운 질문이지만 그래도 흔하게 들을 수 있는 대답들이 있다. 여러 종류의 대답이 있겠지만 현시대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들을 수 있는 답은 아마도 자유로운 삶이 아닐까 싶다. 무엇을 위해 사는가? 내가 마음은 소리를 따라가고 내가 내 인생의 통제권을 가지기 위해. 돈이나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워서 내가 원하는 것을 하고 내가 되고 싶은 무언가가 되기 위해. 그 말인즉 누구도 내가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강요하거나 간섭할 수 없다. 물론 신의 존재는 옵션에서 제외한다. 초월자라는 존재는 믿지 않거나, 존재한다 하더라도 내가 알 수 없다. 더군다나 신이 요구하는 계명, 규범들을 지키기에는, 나의 자유가 너무 심하게 손상된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우리가 아는 위대한 사상가들 _ 알베르 카뮈, 러셀, 밀란 쿤데라, 볼테르. 톨스토이, C.S 루이스_이들 모두가 말하는 하나의 공통된 메시지가 있다. 그런데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 이야기이다. 삶의 의미가 나의 자유가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삶이라면, 그 삶은 의미가 없는 삶에 불과하다.


삶의 의미를 쫓는 것이 무의미하다? 왜 그런 걸까? 알베르 카뮈는 그 누구보다 이 문제에 대해서 현실감 있게 접근한다.


그의 작품 중 <시시포스의 신화>를 보자. 시시포스는 그리스의 신화의 신이지만 다른 신들에게 밉보여 너무나 가혹한 벌을 받는다. 그는 저승에서 큰 돌을 가파른 언덕 꼭대기까지 굴려야 하는데 그 돌은 정상에 닿자마자 다시 바닥으로 굴러 내려간다. 그리고 시시포스는 또다시 똑같이 바위를 꼭대기까지 올리는 일을 하고 상황은 반복된다. 이는 마치 군대에서 삽으로 땅을 판 다음 패인 자리를 다시 메우는 작업과 똑같다. 개인적으로 군생활에서 가장 극혐 했던 업무이기도 했다. 일이 굳이 없어도 나태하지는 사병들을 염려했던 간부가 간간히 그런 일들을 시키곤 했다. 대학교육까지 받은 고급인력을 이런 말도 안 되는 일로 부리는 게 맞는지 머리를 절레절레하던 기억이 난다.


알베르 카뮈는 솔직하게 인정한다. 당신이 초월자를 믿지 않고 천국과 지옥, 영원, 이런 개념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본질적으로 시시포스의 상황과 같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결과적으로 아무 의미 없는 일을 다만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것은 삶이 부조리하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뿐. 그리고 '반항'이라는 감정적인 태도로 반항하는 것에 위안을 얻는 정도.


버트런트 러셀은 이러한 방식으로 표현한다. 우리가 하는 모든 노동과 헌신, 영리함의 결과는 무엇인가? 결과적으로 멸망, 멸종이다. 우리가 속한 태양계가 언제가 맞이할 거대한 죽음 안에서 말이다. 태양계뿐만이 아니라 우주적인 종말 또한 기다리고 있다. 우주는 가속 팽창을 계속하다가 마침내 모든 입자들이 얼어붙는 0K(절대 영도)를 맞이할 것이고, 최후에는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릴 것이다. 시간을 굉장히 축약해서 표현하자면 우리는 모두 가라앉는 배안에 있는 사람들이다. 곧 죽을 운명인 사람들에게 서로 뺨을 치던 뒤통수를 치던 무엇이 중요할까?


볼테르는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우리는 이 우주의 아주 미미한 부분에 불과한데, 무의미함을 생각할 때 왜 인간이라는 존재만 이렇게 괴로워할까. 심지어 우리는 이 거대한 허무함을 향해 분노를 느낀다. 반면에 저기 묶여있는 강아지는 나와 똑같이 지각이 있는 존재인데 이 무의미함에 대해 별 관심도 없고 그렇다고 크게 개의치도 않아 보인다. 볼테르가 느끼는 이 감정을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담백한 문장으로 표현한다. 니체가 말한 영원회귀가 삶의 무거움이라면 우리의 삶은 단 한 번만 일어나고 없어질 가벼움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가벼움을 견딜 수가 없다. 지금 나를 행복하게 하고 즐겁게 하는 모든 것들이 단 한 번의 경험이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영원히 누릴 것처럼 느끼고 있지만 때론 완전 무의미함이라는 너무나 차가운 진실 앞에 마주칠 때 말할 수 없는 가벼움을 느낀다.


C.S 루이스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게 된다. 만약 이 세상의 창조자가 없다면 그리고 그 어딘가에 진리라는 객관적 진실이 없다면 우리가 느끼는 모든 것은 그냥 단순한 뇌의 화학작용의 결과물일 뿐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있을 때 느끼는 감정은 단지 도파민과 아드레날린의 분비일 뿐이다. 음악을 들을 때 기억해할 사항은 내가 느끼는 무언가가 단지 생물학적 반응, 딱 거기까지 이다. 이 이상의 어떠한 의미도 없다. 당신은 당신의 애인 앞에서 살아한다는 말 대신 나의 호르몬 분비가 평소에 비해 30% 정도 추가로 분출되고 있다고 표현해야 한다.


이 모든 것 때문이었을까. 톨스토이는 50대에 들어 거의 아무 이유 없이 패닉 상태에 빠진다. 그는 공황에 시달릴 이유가 전혀 없는 사람인 것이 그를 더 이해하지 못하게 한다. 그는 이미 생전에 작가로서 명예를 얻었고 물질적으로도 넉넉했었다. 거기다 아내와 자식들이 있는 안락한 가정의 가장이기도 했다.(물론 아내와 자주 싸우기는 했지만) 이런 그에게 모든 것이 부질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불현듯 엄습했다. 그리고 그 정체불명의 불안감과 공포에 맞서 가는 그의 여정을 통해 그의 삶의 전환기가 시작된다.


내가 내 인생에 절대권력이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기준이 내 자유라는 것의 결과가 궁극적으로 삶의 무의미함이라는 답을 도출한다면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리고 왜 우리는 내면 깊은 곳에서 내 삶이 결국은 무의미하다는 사실에 대해 불편해할까? 이 무의미함을 부정하고 극복하려는 내면의 의지가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시 그림 앞에서]


알베르 카뮈 : 결국 우리도 곧 땅으로 추락할 저 고양이와 같다는 의미 이신가요?


톨스토이 : 반은 맞고 반은 틀리네.


알베르 카뮈: 그게 무슨 애기시죠?


톨스토이 : 절반은 진실은 우리가 고양이와 똑같은 처지라는 것. 그려달라고 요청한 적도 없는데 어느새 그림 안에 그려져 있고 정신을 차려보니 곧 바닥으로 떨어질 운명을 즉시 한다라는 것.


알베르 카뮈 : 그럼 다른 반은 무엇인가요?


톨스토이 : 우리는 추락하지 않을 거라는 것


알베르 카뮈 : 왜요?


톨스토이 : 근원을 알 수 없는 기둥이 있는데 거기에 연결돼있는 끈이 우리를 붙들어 매고 있다는 것


알베르 카뮈 : 그건.. 무슨 의미시죠?


톨스토이 : 다음 그림을 보며 천천히 이야기하세.




**참고문헌

Tim keller, A reason for living

Albert Camus, The Myth of Sisyphus

Leo Tolstoy, Confession

Bertrand Russell , The Conquest of Happi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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