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살목(被殺木)의 눈물
제석봉은 장터목에서 천왕봉 사이에 있는 봉우리다. 장터목에서 힘들게 돌계단을 올라서면, 시야가 트이며 천왕봉 보다 먼저, 말라죽은 나무 몇 그루가 눈에 들어온다. 유명한 제석봉 고사목이다.
여름이면 초록색 사초밭에 비를 맞고 섰고, 겨울이면 어린 구상나무들이 눈과 얼음을 뒤집어쓰고 추위를 견딜 때, 고사목은 맨 몸으로 고고하게 서서 바람을 맞는다. 펑퍼짐한 봉우리에 수 십 그루의 죽은 나무들이 삐쭉삐쭉 서 있는 모습은 지리산을 대표하는 풍경이 되어 많은 사진 작품으로 남았다.
천왕봉에서 노고단까지 이어진 주능선에 운해가 깔리고, 고사목 사이로 반야봉과 노고단이 보이는 풍광은 가히 장관이다. 그래서 지리산에서 야영과 취사가 가능하던 시절에는 가장 인기 있는 야영지였다.
제석봉은 일제강점기와 6.25, 빨치산 토벌작전을 겪으면서도 울창한 숲을 유지했다. 1472년 지리산을 유람한 김종직(金宗直)은 『유두류록(遊頭流錄)』에, 숲이 매우 울창하여 "햇빛이 땅에 닿지 않을 정도"라고 기록했다.
해방 이후, 도벌꾼들이 지리산의 아름드리나무들을 탐냈으나, 그것도 접근이 가능한 곳이 대상이었다. 칠선계곡 인근 주민들은 골짜기의 아름드리나무를 베어 나무 그릇을 만들어 내다 팔 앗고, 뱀사골에는 벌목도로까지 깔아놓고 나무를 베어서 가공하는 공장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뱀사골의 지계곡들이 벌목트럭이 지나는 순서에 따른 이차골, 삼차골, 막차골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유다. 모두가 도벌(불법적인 벌목)이었다.
도벌꾼들이 제석봉의 아름드리 주목과 구상나무를 베기 시작했다. 산세가 험해서 운반 차량을 올릴 도로를 낼 수 없으니, 소를 끌고 올라와 산 아래까지 나무를 실어 냈다고 한다. 하루에 트럭 250대 분량을 실어 냈다니, 도저히 상상이 안 간다. 결국 그 피해가 막심해져, 국회에서 진상조사특별위원회를 파견해서 조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단순히 개인 도벌꾼들이 하는 작은 규모가 아니라, 경찰, 공무원들까지 개입한 권력형 범죄였다. 사건의 중심에 전북 경찰국장과 군사 쿠데타 주체세력 출신인 국회 부의장까지 연루되었다는 게 밝혀지자 진상조사는 유야무야 되고 말았다. 사람들의 시선을 돌릴 대상이 필요해진 쿠데타 정부는, 산에 숨어있는 도벌꾼들을 잡으러 경찰 병력을 동원했고, 도벌꾼들은 도망치며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제석봉에 불을 질렀다. 6·25와 빨치산 전투를 이겨낸 제석봉의 구상나무들이 불에 타 죽은 것이다.
불에 타서 재가 된 나무도 있고, 불길에 거슬리고 서서히 죽어 간 나무들도 있다. 그렇게 나무들은 말없이 서서 제석봉의 풍경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 나무를 고사목이라 했다. 고사(枯死)는 자연스럽게 말라죽었다는 뜻이다. 저 나무들은 그렇게 죽지 않았다. 베이고, 불에 타다가 말라죽었다. 사람의 손에 의해 죽었으니 고사목이 아니라 피살목(被殺木)이라 해야 맞다.
제석봉의 이름은 제석(帝釋), 제석천(帝釋天)에서 유래했다. 제석천은 불법을 수호하는 신이다. 그런데 제석천도 제석봉의 나무들은 지키지 못했다. 제석천의 무기가 번개를 내리치는 금강저(金剛杵)라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제석봉은 지리산에서 번개가 가장 많이 내려 꽂히는 봉우리다.
이제 그 비극을 기억하는 사람도 거의 없고, 피살목마저 열 그루 남짓 듬성듬성 서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 사이사이, 작은 구상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국립공원공단이 심은 나무들이다. 아직 어리고 작지만, 제법 단단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세월이 지나면 피살목은 사라지고, 구상나무가 그 자리를 채울 것이다.
나무는 쓰러지고
나무는 자라고 사람들은 걷고,
지리산은 늘 지리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