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에 관한 기록
요정(妖精)이란 무엇인가.
자고로, 妖(요)는 요염하고 신비로운 기운이요, 精(정)은 만물의 정수(精髓)라.
세상 이치로는 설명되지 아니하며, 보이되 잡히지 아니하고 느껴지되 증명되지 않는 존재를 이르는 말이다.
서양의 서책(書冊)에 이르기를, 요정은 날개를 달고 허공을 날며 빛을 뿌린다 하였으니, 작고 가볍고 신비로우며, 인간의 삶에 깃들었다 홀연히 사라진다.
莎士比亞(셰익스피어)의 提他尼亞(티타니아)는 꽃잎 위에서 잠들고, 彼得潘(피터팬)의 丁可鈴(팅커벨)은 황금빛 가루를 흩뿌리며 밤하늘을 가르나니,
아름답되 현실에 발을 딛지 아니하고, 인간을 이롭게 하되 머물지는 않더라.
경상도 지리산에도 요정(妖精)이 사는데, 그 이름이 '달'이라. 서양의 요정과 달리 가볍지 아니하고 신비롭지도 않더라.
다만, 힘이 좋아 무거운 것을 잘 지고, 날지 못하지만 가파른 산길을 뛰어오르더라.
먹기를 좋아하고 옷차림이 까다로우나, 성격이 밝고 호탕하며 사람들 돕기를 즐기니, 주위의 칭찬이 자자하더라.
이에 독거노인이 그 행적을 기록하니, 지리산 요정전(妖精傳)이라 한다.
계사년(癸巳年) 동지에 '달'이 지리산에 처음 나타났다. 쌀 반 섬이 넉넉한 배낭을 졌는데, '달'이 메니 작아 보이더라. 그것도 모자라 장비를 주렁주렁 달았으니, 장터목에 물건 팔러 가는 보부상의 형색이라, 사람들이 이를 보고 웃음을 참지 못하였다. 이는 아직 산길에 대한 경험이 부족한 연유나, '달'은 개의치 아니하더라.
전날 폭설이 내린 탓에, 숲길이 눈에 덮여 사방을 분간하기 어렵고, 자칫 길을 잃을까 염려하여 발걸음이 늦어지는데, '달'이 앞으로 나서 러셀을 자청하였다.
러셀이라 함은, 쌓인 눈을 온몸으로 헤치며 길을 내는 험한 일이니 장정도 힘들어하는 바, 허벅지까지 쌓인 눈을 쟁기질하는 소처럼 헤치고 나가는 '달'의 모습이 가히 볼만하더라.
비록 행색은 초보이나 기개는 여장부라, 큰 산꾼이 될 자질을 타고났더라. 일행이 치하하며 술잔을 건네었으나, '달'은 거절하니, 다들 過麥田大醉(과맥전대취-보리밭을 지나가도 크게 취한다)인 줄 알았다.
허나, 이것은 우리를 속였음이니, 취하면 나무를 붙잡고 희롱하고, 땅을 기어 다니는 고약한 버릇이 있더라.
지리산은 그 둘레가 팔백 리에, 높이 육백여 장, 면적이 일억 사천만 평에 이른다. 봉우리가 백 개에 골이 아흔아홉 개니, 가히 발길 닿는 곳마다 절경이라. 수행하는 기인, 도사가 수 백이요, 일 년 내내 산에 드는 유산객이 수 백 만이다.
어느 아는 체하기 좋아하는 산객이 지리산을 유람하다가, 산더미만 한 배낭을 지고 지나가는 '달'을 보고 깜짝 놀라서 말하기를,
"내 지리산에 선녀가 있다는 말은 들었으나, 저 처자는 무엇인고?"
"인물은 선녀이나 행색이 아니로다."
"선녀가 저렇게 무거운 봇짐을 지고 달려갈 리 만무하니, 이는 필히 서양 서책(書冊)에 나오는 요정이라!"
하고 아는 체를 하였더라.
산객이 선녀만 알고 요정이 무언지 잘 몰라서 한 헛소리나, 일행들이 요정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였다.
그 뒤로 '달'은 스스로 요정이라고 우기니, 모두가 후환이 두려워 반항하지 못하고 요정이라 부르더라.
'달'의 행색을 보면, 요정과는 별 무관이라.
굳이 따지자면, 위엄 있고 고집 센 성격이 '티타니아'를 닮았으나, 이는 부분이라. 인물은 고우나 왕비가 될 상은 아니요, 고집이 세다지만 누구를 이기는 적이 없더라.
게다가, 식성은 풀을 싫어하고 고기를 즐기는데,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눈 비비고 삼겹살 굽기를 좋아하고, 한 끼에 고기 한 근을 해치운다. 어쩌다 누가 통닭이라도 가져오면 앉은자리에서 뼈만 추려내니, 먹성은 장정이 울고 갈 지경이다.
'달'이 지고 다니는 배낭은 그 무게만 거뜬히 백 근이다. 부피가 우람하여 한아름이 넘으니, 감히 필부들은 엄두도 못 낼 지경이라. 그러나 어리석은 산객들이 여자라 우습게 여기고 한번 메고나 보자고 청하였다가, 오금을 못 펴고 주저앉아 웃음거리가 된 이가 한 둘이 아니었다.
점차 '지리산에 어여쁜 요정이 있다'는 소문이 팔도에 자자하니, 산 좀 다녔다는 젊은 산꾼들이 산행을 청하는데, 그 수가 천왕봉에서 중산리에 닿았다.
'달'은 그중 신수 번듯하고 인물이 출중한 놈들만 골라 지리산에 청하니, 점지받은 산꾼들이 아랫도리에서 방울 소리가 나도록 뛰어왔더라.
허나, '달'이 누구인가? 하늘이 내린 산꾼이라! 배낭을 메고 한 걸음에 봉우리를 뛰어넘고, 깊은 계곡을 평지처럼 내달리니, 어찌 '달'의 미모에 혹한 사내들이 따라갈 수 있으리오.
오호 애제라! 두 번 따라오는 놈이 한 명도 없더라.
달은 성정이 밝고 화통하여 주위 사람들에게 기운을 주며, 제 것을 나누어 어려운 사람 돕기를 좋아하더라.
무거운 짐은 제 배낭에 넣고, 가볍고 부피만 큰 짐은 일행에게 양보하니, 그 성품이 노고 할머니도 칭찬할 지경이라. 품행이 단정하여 산에서도 항상 옷매가 가지런하고 색깔이 고우니, 그에 더하여 갈아입을 옷 여러 벌을 챙겨 와서 수시로 변복하더라.
사람들이 '이는 남자를 후리기 위함'이라고 수군댔으나, '달'을 모르고 하는 모함이니, '달'은 다만, "소녀는 산에 대한 예의를 지킬 뿐입니다." 하더라.
달의 인품이 고상하여 존경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모 년에 '달'이 키우던 개가 죽었을 때, '달'을 아는 사람 하나가 그 소식을 듣고, 지리산에 달려가 대성통곡을 하였다는 일화가 전한다.
지리산 요정에 관한 이야기를 다 적으면 나라의 종이값이 올라갈 지경이라 이에 멈추니, 내가 행적을 전하는 이유는, 후세에 지리산을 다니는 사람들이 '달'의 품성을 배우고 이를 따르기를 바라는 바라,
병오년(丙午年) 봄에 지리산 독거노인이 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