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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제이쿠 Mar 07. 2021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 것

아빠의 보일러 교체 요청 사건

설을 지나 창원집엘 갔다. 설을 즈음해 유난히 추웠다. 가기 전부터 보일러가 고장이 났다는 얘기를 들었고, 아빠가 그 전엔 수리 기사님이 온다고 했으나 결국 보일러는 고쳐지지 않았다.


있는 동안 물을 데워 샤워를 하고, 히터와 전기장판은 계속 돌아갔다. 불편했지만, 몇 주간의 사태를 겪은 엄마 아빠는 그 사이 그런 프로세스가 익숙해진 느낌이었다.


서울로 돌아왔고, 그 주 금요일에 기사님이 오기로 했다고 했다. 금요일 아침이었다. 엄마가 전화가 왔다.

"혜현아 결국 기사님이 안 왔어. 너희 아빠는 그런데도 알겠다면서 또 기다리겠단다. 이러다 안 오는 거 아니가? 이상한 물건을 주거나."



"일단 기다려 보기로 했어. 다음주 화요일엔 꼭 된대"


안 되겠다 싶어 아빠한테 전화를 했고, 기사님 번호를 달라고 했다. 이미 선금까지 보낸 상황에서 자꾸 약속 날짜를 미룬 게 19일째였다. 아빠에게 전해 듣는 걸로는 안심이 안돼서 내가 해보겠다고 했더니 그럴 사람 아니라고 전화를 하지 말라고 하더라. 속으로 아빠는 왜 저렇게 타인에게 관대할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그 불편함과 추가로 더 들어가는 비용을 감수하면서까지 약속을 어긴 기사님 편을 드는 건 무슨 심리인지 궁금했다.


답답해하는 엄마, 이러다 추위에 고생만 하다가 봄이 올 것 같은 걱정에 아빠 몰래 기사님께 전화를 걸었다. 번호는 아빠와의 대화에서 유추한 단어들로 업체명을 검색했고, 그러다 찾아냈다. 혹시나 하며 걸었다.


"저, 안녕하세요. 다름이 아니라 부모님 댁 보일러 교체 때문에 전화를 드렸어요."

아빠는 제가 전화한 사실을 모른다, 약속한 수리 일정이 자꾸 미뤄져서 엄마가 걱정을 하고 있는 상황이고, 물은 데워서 사용해야 하고, 히터에 전기장판에 불편한 게 이만저만이 아니니 꼭 빠른 교체를 부탁드린다고 말씀드렸다. 기사님께서 다음주 화요일엔 꼭 된다고 하시니, 아빠가 진행한 건이니 더이상 왈가왈부 할 수 없어 더 믿어 보기로 했다.


전화를 끊고 나니 아빠가 왜 이분께 계속 미뤄지는 약속을 이해해줬는지  알겠더라. 너무 공손하게 거듭 죄송하다고 하시니 '이렇게까지 응대하는데, 되겠지'라는 마음이었을 테다. 그래도 고객과의 약속인데, 이미 20일이 지난 상황이지 않나. 그것도 일정 금액을 먼저 이체했는데, 방문 약속 때마다 제품을 못구했다고 하니.


잠시 뒤 기사님께 문자가 왔다. 아버님께서 따님이 전화했냐고 물으시길래 아니라고 속일 수가 없어서 사실대로 말씀을 드렸다고. "괜찮습니다. 저 때문에 곤란하게 해 드린 것 같네요. 바쁘시겠지만, 약속한 다음 주 화요일은 꼭 교체를 부탁드립니다"라는 내용을 담아 회신을 드렸다.



"그럴 수도 있지, 덕분에 다른 업체를 만났고 깔끔하게 교체했으니"


약속한 화요일이 왔다. 결국 기사님은 이날도 방문을 안 하셨고, 환불을 해주셨다고 했다. 아빠는 그러곤 다른 업체에 전화를 했고, 그날 오후 바로 교체를 받았다. 이렇게 허무할 수가. 불편함과 불안함이 공존하던 그 시간이 얼마이던가.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라고 했다.


짧은 이 사건을 보면서 약속을 몇 번이나 다시 그 기사님을 믿고 기다려준 아빠의 마음이 궁금했다. 나와 가족이 겪는 불편함을 생각한다면 몇 번이고 따져 묻고 화를 냈을 상황일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내가 아는 아빠는 타인에게 화를 절대 내지 않으니까 이해할 만했다. 순간, 아니 방송국 국장까지 한 사람이 저렇게 늘 당하게 행동하면 어쩌나, 일을 해본 사람이 맞나라는 생각도 들었고.


그래도, 아빠만의 지혜로운 방법이었으리라며 나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빠의 방법을 믿어 본다. 이 와중에도 아빠는 늘 잘 하는 말인 "인생이 다 그런 거 아니겠어. 순리대로 된 거지 뭐"라는 말을 남겼다.



그 상황에 대한 아빠의 짧은 일기가 재밌어서 짤막하게 붙여본다.

2.19. 금

 어느 해보다도 추운 겨울. 영하의 날씨가 많은 2월 1일. 아파트 보일러 고장으로 사용 불가. 한 사나흘이면 될 거라는 약속에 주문. 53만 원에 먼저 30만 원 입금. 그런데 오늘이 벌써 2월 19일. 또다시 하는 말은 다음 주 화요일에나 되겠다고. (난방 불가로 인한 불편 : 추위. 전기장판 구입. 히터 장만. 샤워, 설거지 등 마음대로 온수를 사용하지 못 함. 이로 인하여 물을 끓여서 사용해야 하는 번거로움. 실내 건조로 인한 피부 트러블. 얼굴, 몸, 머리 등의 각질이나 간지러움의  고통. 두피 관리받는 등의 수많은 불편함...). 과연 나는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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