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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르페디엠 Sep 10. 2022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차근차근 떠날 준비를 시작하다 - military to Brisbane

저는 어려서부터 영어 공부를 좋아했습니다. 윤선생을 초1 즈음 시작했는데 부모님께는 아마도 제가 받은 사교육 중 가장 큰 지출이었을 겁니다. 중/고등학교 다니는 내내 과외는 고사하고 학원도 안 다녔으니까요.(중3 겨울방학 시절 딱 두 달 빼고) 윤선생은 6-7년 정도 했습니다. 덕분에 영어는 큰 공부 없이도 늘 상위 10% 안에 들었던 것 같아요. 물론 종종 영어 공부가 몹시 하기 싫었던 적은 있었지만(아무래도 친구들과 노는 게 훨씬 재밌죠), 영어 실력을 키운다는 것은 제게 대체로 흥미롭고 도전적인 시간이었습니다. 매일 영어공부를 했었기 때문에 시험 기간에 몰아서 공부하는 경우도 잘 없었고요.


윤선생 커리큘럼은 영어를 영어로서 배울 수 있게 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중, 고등학교로 올라가니 '성문 기초영어'라는 바이블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학문적인 문법 책은 너무 어려웠고 공부하기도 싫었습니다. 별로 와닿지가 않는다고 해야 할까요, 성문영어로 과외를 받던 친구보다 제가 영어 성적이 더 좋았고 아직까지도 공식들은 잘 모릅니다. 곧 태어날 아기가 유치원 나이쯤 되면, 제 아이에게도 윤선생 교육을 시켜보고 싶습니다.

(저는 오픽 AL 점수를 갖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대학생활 중 Cebu연수/호주워홀/미국 인턴십을 거쳤으니 단순 윤선생으로만 얻은 건 아니겠지만, 윤선생을 통해 접한 영어가 제 life-long취미가 되었음은 분명합니다.)




어려서부터 뭔가를 조립하고 만드는 걸 좋아했기 때문에 이과 선택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만, 진득이 앉아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해답을 찾아야 하는 수학 과목은 제 주특기가 아니었고 영어를 훨씬 더 잘하고 좋아했습니다. 영어를 좋아하는 이과생이랄까요.


따라서, 언젠가 영어를 쓰는 나라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로망을 갖게 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스무 살이 되어 대학에서 영어 수업을 듣다 보니 영어권 국가로 가서 그들의 친구(one of them)가 되어 서양 문화도 배우고 실력도 업그레이드하고 싶었지요. 돈까지 벌 수 있는 워킹홀리데이 제도는 제가 처한 상황에 안성맞춤이었습니다.


저는 행동파기 때문에, 군생활 중 상병 말 즈음부터 개인정비 시간을 활용하여 사지방(사이버 지식정보방-부대 내 PC방)에서 워홀 준비를 했습니다. 17시에 일과가 끝나면 시간이 정말 많았고 먹은 짬밥이 늘어나다 보니 감정적으로도 여유가 많았습니다. 이 황금 같은 기간을 쓸모없는 시간으로 흘려보내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웠습니다. 그래서 준비는 군생활 중에 마치고 전역 후 바로 해외로 떠날 수 있도록 계획했던 것이지요.


여러 정보를 검색해보고, 일을 하면서 영어를 자주 쓸 수 있는 Ausie job(오지잡-일터의 owner가 호주 사람인 경우)을 구해야 내가 원하는 워홀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왜냐하면 한인 식당의 경우 아무래도 스태프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이니 우리끼리는 한국어를 쓸 테고, 이는 제가 생각했던 워홀이 아니었으니까요.  운전병의 탈을 쓴 작업병으로서 2년간 지내던 당시의 저로서는 그러한 직장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기에, 필리핀 Cebu 섬에서 2달간 어학공부를 하고 Cebu에서 Brisbane으로 이동하기로 계획을 세웠습니다.


병장 말년 휴가를 나왔을 때, 가장 유명한 강남역 근처의 어학원을 찾아가 상담을 받았습니다. 갇혀서 공부만 미친 듯이 하는 K-학습법은 싫었기에 놀 땐 열심히 놀고 공부할 땐 열심히 공부할 수 있는 곳인 CIA(Cebu International Academy) IELTS 2달 과정으로 예약했습니다. 이 학원은 세미스파르타 교과 과정으로 주중에는 08-18시까지 공부하고 20시까지 야자를 했지요. 그리고 주말에는 자유 시간을 보장해주는 제도가 있어 배치 메이트끼리 매 주말마다 여행도 가는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물론 모든 계획에는 돈이 들겠지요. 입대 전 과외와 알바로 용돈을 벌며 생활했지만 저축을 할 만큼의 수준은 못되었기 때문에 색다른 방법이 필요했습니다. 학원 및 항공비 200만 원, 호주 정착비 및 생활비 기타 400만 원 총 600만 원 정도가 필요했지요. 결국 이 돈은 부모님께 졸업 후에 갚겠다고 말씀드리고 빌렸습니다. 제 계획을 잘 설명드리니 흔쾌히 빌려주셨던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취업 후 직접 돈을 벌어보니 청춘시절 해외 생활을 해볼 수 있는 기회에 비교한다면 600만 원이란 돈은 정말... 별 거 아니더라고요. 왜냐면 취업을 하는 순간 몇달간 쉬면서 해외로 나갈 결단을 하기에는 훨씬 더 큰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직장생활 1년 차에 5만 원짜리 현금 다발로 어머니께 갚았습니다. 어머니는 본인 유럽여행 자금으로 써야겠다며 기뻐하셨지요. 제가 그땐 개념이 없어서 이자도 챙겨드리지 못했네요, 죄송합니다 어머니.




세부에서는 주중에는 공부도 열심히 하고 밤과 주말에는 산미구엘과 레드 홀스 맥주를 정말 열심히도 마셨습니다. 당시에는 셔플 댄스(party rock is in the house tonight~)가 유행이었는데 저의 말년에 마침 사회에서 댄스동아리 회장을 하던 신병에게 배웠던 실력을 바탕으로 열심히 추었지요. 셔플은 제가 유일하게 출줄 아는 춤입니다만.


매 주말마다는 모알보알이나 카모테스 섬 등 근교로 여행을 다니며 비현실적인 날들을 보냈어요. 아무래도 필리핀 현지인 티쳐들과 친하게 지내다 보니(나이대가 비슷-합니다), 거의 모든 생활을 필리핀 물가로 할 수 있어 가능한 일인듯 싶습니다. 여행을 갈 때에도 관광사 물가가 아닌 현지 물가로 갈 수 있었기 때문에 정말 좋았어요. 필리핀의 장점 중 하나는 영어가 공용어라서 아예 말이 안 통하는 경우는 잘 없다는 겁니다. 이 기간은 공부와 놀기 두 가지 모두 정말 열심히 한 시간이어서 제 인생에서 가장 즐거웠던 순간으로 남아있습니다.


모름지기 학원인데, 공부 이야기는 없고 노는 이야기만 잔뜩 했군요. 공부도 나름 열심히 했습니다. 평일 정규 수업은 8교시까지 있었는데 이 중 3시간 정도는 man to man lesson이었고 5시간 정도는 group lesson이었습니다. IELTS 과정이다 보니 난이도가 꽤 높아 실력 향상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시험 특성상 글쓰기 시험도 있었는데 쓰기/듣기/말하기의 전 영역을 공부할 수 있어 실용적이었습니다. 배치메이트 중 일본인 친구도 있어 영어를 더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었고요.



두 달간의 구운몽 후, 밤 비행기로 드디어 호주 브리즈번에 도착했습니다. 낯선 호주 땅에 지인은 단 한 명도 없었고 24살의 저는 패기와 두근거리는 마음만 가지고 브리즈번 시티 내 호스텔로 발걸음을 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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