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이라면 질문이 필수 아닌가요?
나는 질문하는 신앙인이라고 스스로를 정의한다. 그렇다면 많고 많은 기독교의 사랑, 소망, 은혜 등 따뜻한 단어를 제외하고 왜 굳이 ‘질문’라고 묻는다면 내가 믿는 기독교는 답이 아니라 스스로가 당연하게 여기는 인생과 성립된 신앙을 다시 망치로 때려 부시는 과정이며 또한 새로운 만남과 거침없는 탐험가로서 세상을 여행하며 질문하는 것 때문이다.
또한 나는 기독교인이면서 타 종교의 소중함도 너무도 느끼며 살아간다. 자칫 다종교 주의로 오해받을 수 있겠지만 또 그러한 건 아니다. 왜냐하면 나와 가까운 친구들이 다양한 종교(이슬람, 불교, 천주교 등등)를 믿고 있고 그들이 믿는 영적 세계관 또한 굉장히 겸허하고 소중한 것임을 알아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종교를 제대로 믿고 공부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자신의 삶에서 무엇이 소중하고 중심이 어디인지 끊임없이 알아가고 찾아간다. 보이는 세계는 수많은 오류가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세계를 알고 나서부터는 정말로 삶에서 어떤 것이 중요한지 분별력이 생기기 때문이다.
내가 믿는 기독교 또한 그렇다. 삶을 더 잘 살아내기 위해 그리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나는 이 종교를 믿는다. 종교 이상의 신앙의 힘을 알고 그 힘은 도저히 세상에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사실 가장 중요한 것은 매일 아니 매 순간 하나님의 의미를 찾아내고 예수님의 삶을 발견해야만 타인들과 더 잘 소통할 수 있다. 진정한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며, 복음의 진액은 자신의 독생자를 아낌없이 내어주셨고 사랑의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시는 사랑의 진리가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알고 믿는 것이다. 삶에 있어서 타인에게 나를 얼마나 아낌없이 내어주며 사랑할 수 있는가. 즉, 자기 자신을 얼마나 내려놓을 수 있는가가 관건이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네가 즐겨 마시는 커피의 종류를 알고, 네가 하루에 몇 시간을 자야 개운함을 느끼는지 알고, 네가 좋아하는 가수와 그의 디스코그래피를 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인가? 나는 네가 커피 향을 맡을 때 너를 천천히 물들이는 그 느낌을 모르고, 네가 일곱 시간을 자고 눈을 떴을 때 네 몸을 감싸는 그 느낌을 모르고, 네가 좋아하는 가수의 목소리가 네 귀에 가닿을 때의 그 느낌을 모른다. 일시적이고 희미한, 그러나 어쩌면 너의 가장 깊은 곳에서의 울림일 그것을 내가 모른다면 나는 너의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 것인가? 느낌이라는 층위에서 나와 너는 대체로 타자다. 나는 그저 나라는 느낌. 너는 그냥 너라는 느낌. 그렇다면 사랑이란 무엇인가. 아마도 그것은 느낌의 세계 안에서 드물게 발생하는 사건일 것이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명확히 표명될 수 없는 느낌들의 기적적인 교류. 그러니까 어떤 느낌 안에서 두 존재가 만나는 짧은 순간. 나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지금 너를 사로잡고 있는 느낌을 알 수 있고, 그 느낌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 신형철, 느낌의 공동체 중에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겸허한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게끔 한 그 모든 섭리가 우리는 차마 설명할 수 없는 거대한 사랑 그 자체이다. 사랑이란 우리가 아무리 논리적으로 설명을 하려고 해도 불가능한 느낌의 기적적인 교류이다. 그 느낌은 사랑을 시작하게끔 만들고 나로 인해 멈출 수 없게 만든다. 그래서 더욱이 내가 기독교를 믿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삶에서 소중한 것을 올바르게 찾아가는 과정인 거 같다. 혹여라도 내 분별력을 잃고 힘을 잔뜩 쥐고 감정 따위에 휘둘려 사랑에 빠진다면, 아니 그렇게 사랑에 빠졌던 과거의 나를 위로하며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자'라고 말해주고 싶다. 모래알이 손바닥에서 빠져나가듯이 내 힘을 내려놓고 모든 것이 느낌의 세계로부터 온다는 것을 인정하자. 머리가 아닌 가슴이 설레는 일들을 찾아서 사랑하자. 그런 일들을 사랑하듯이 사람들도 사랑하자. 내 욕심이 아닌 하늘에서 내려오는 사랑으로 세상을 사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