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바탕을 채우는 일

그림을 그리고 산다는 것

by 설주


상상도 못 하게, 아니 넘어가지도 못하게 커 보이는 장벽이 내 눈앞에 존재할 때가 있다. 그 괴로움을 고요하게 받아들이기가 어려울 때 주저앉아 버리고 싶다. 마음에서 이기지 못한 시간들은 나를 좌절하게 만들곤 한다.


그럴 땐 습관처럼 조용히 화구 박스에서 물감과 붓을 꺼낸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변함이 없었다. 아픔을 사라지게 하기 위한 방법은 오직 하나였다. 내게 너무 크게 다가온 것들에 압도되지 않기 위해 그림을 그려야 했다.


흰 캔버스는 언제나 나를 자유롭고, 살아있게 만들었다. 아무것도 없는 무의 상태는 내가 채워가야 할 미래 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가장 직관적인 향기를 뿜어낼 수 있는 건 두 손에 지닌 붓. 어려워도 즐겁게. 늘 그래 왔던 것처럼 그림을 그려냈다. 색들이 채워지면 내 안의 무언가 알 수 없는 것이 부풀어 올랐다. 나의 아픔들이 모두 허구였음을 밝혀지는 지금. 내가 두 손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이 시간.


살고 싶다.

살아있음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고요하다.

나는 고요함 안에 더 강하게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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