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자, 탈출을 결심하다

자력 탈출에서 타력 탈출로!

by 우연의 음악

디카프리오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바바를 알아야 한다. 바바가 누구냐 하면, 앞에서 말한 양평 용녀의 이모를 말한다. 그러니까 미국에 살고 있고, 이름은 바바지만 사실은 한국 여자다. 원래 이름은 춘자.

1988년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리던 그해 2월, 서울 변두리에 있는 삼류 여상을 졸업한 춘자는 졸업과 동시에 은행에 취직을 했다. 꿈에 그리던 은행에 취직을 했으니 춘자는 행복했다. 동네 노인들이 한여름에 은행으로 피서를 가던 시절이었으니 주변 사람들도 춘자를 무척 부러워했다.


늘 깨끗한 유니폼을 차려입고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곳에 앉아 사람들이 그렇게 갖고 싶어 하는 돈을 온종일 세고, 4시 30분만 되면 어김없이 ‘샷따’를 내려버리는 꿈의 직장이었다. 가난으로 똘똘 뭉친 지긋지긋한 집구석에서 어떻게 해서라도 탈출하고 싶었던 춘자는 은행이라는 번듯한 직장에 들어감으로써 적어도 몸뚱이 일부는 탈출에 성공했다고 믿었다. 하지만 탈출이 아니라 지옥으로 걸어 들어갔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제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들 정도로 살찐 여자가 손가락마다 금가락지를 촘촘하게 낀 손을 보란 듯이 흔들어 대며 춘자의 열 달치 월급보다 많은 돈을 찾아가면서 “춘자 씨, 이번 달에는 생활비가 좀 모자랄 것 같애.”할 때는 부아가 치밀었다.


날마다 은행 마감 시간이 다 되어 나타나서는 춘자의 한 달 치 월급보다 많은 돈을 입금하면서 코맹맹이 소리로 “춘자 씨, 오늘은 환자가 많이 없었다네∼”하는 여자는 은행 뒤에 있는 무슨 내과 마누라였다.


이런 사람들을 창구에서 마주할 때면 춘자는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부럽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고, 태어날 때부터 가난했던 자신의 처지에 대한 연민도 들고, 그렇게 말하는 그 여자들의 주둥이를 찢어 버리고 싶다는 폭력적인 상상력을 동반한 분노도 꿈틀거렸다.


물론 때가 타서 반들반들한 앞치마에서 꼬깃꼬깃한 천 원짜리 몇 장과 한 움큼의 동전을 쏟아 놓고는 입금해 달라는 은행 앞 포장마차 아주머니나, 가끔 나타나서는 곶감 빼먹듯 야금야금 통장의 돈을 빼먹다가 마침내 얼마 안 남은 돈을 마지막으로 탈탈 털어 가면서 절망적인 표정을 짓는 삼촌뻘 아저씨를 볼 때는 몰래 자기 돈을 통장에 넣어주고 싶다는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은 생각도 들었다.


사실 돼지 부인이나 의사 마누라 같은 사람은 극소수였고, 대부분의 고객들은 포장마차 아주머니나 삼촌뻘 아저씨 같은 사람들이었다. 은행이란 곳이 원래 가난뱅이들의 때 묻은 돈을 모아다가 배에 기름기가 출렁이는 인간들이 땅 사고, 집 사고, 공장 짓고, 사기 치는데 뒷돈을 대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연민의 정은 금방 사그라지기 마련이고 분노의 감정은 시도 때도 없이 활활 타오르듯, 춘자의 눈에는 대다수의 가난뱅이들보다는 극소수의 돼지부인과 의사 마누라 같은 사람들만 눈에 들어왔다. 그런 편협된 시각은 시간이 갈수록 고착되어 갔으니 탈출 지로 생각했던 은행은 하루하루 고통과 괴로움의 강도가 더해지는 지옥이 되고 말았다.


가끔은 이성적인 판단력이 작용해 자신의 월급에서 생활비를 뺀 나머지 돈을 차곡차곡 모아보는 기특한 상상도 했다. 하지만 그런 기특한 상상은 번번이 돼지부인과 의사 마누라의 반들반들한 낯빤대기 앞에서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숨만 쉬고 살 각오로 월급을 통째 모아 본들, 의사 마누라가 입금하는 하루 치에도 모자라는 것은 물론이고, 설사 그렇게 1년을 도 닦듯 살아 본들 돼지 부인 한 달치 생활비만큼도 모을 수 없다는 것이 팩트였기 때문이다. 결론은 은행에서 아무리 오래 일한다 해도 자신이 세는 그 많은 돈이 자기 것이 되지 않는 한 지긋지긋한 가난뱅이 집구석에서 탈출한다는 꿈은 이루어질 것 같지 않았다.


오빠 두 명의 희생으로 집안 유일의 고졸 학력자가 되고, 하나뿐인 언니의 결혼 자금을 뒷돈으로 밀어 넣어 은행원이 되었으니 어쩌면 처음부터 춘자 인생의 한계 상황은 분명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 한계 상황을 받아드리기에는 춘자의 욕망 사이즈가 너무 컸다. 그렇다고 포기하기에는 춘자의 욕망이 너무너무 강렬했다.


자력 탈출이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춘자는 타력 탈출로 작전을 바꾸었다. 그런 의미에서 은행은 안성맞춤이었다. 돈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데 은행보다 더 좋은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춘자가 은행원이 된 뒤 가족들은 마치 은행 돈이 춘자의 돈이라도 되는 듯 마음의 호사를 실컷 누렸다. 그런 심리적 호사는 시간이 지날수록 현실화에 대한 기대치를 상승시켰다. 그런데 좀체 현실화 되지는 않았다. 월급을 받아도 가족들에게는 한 푼도 내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전혀 내놓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오빠 두 명의 희생과 하나뿐인 언니의 결혼 자금이라는 원금에는 턱없이 못 미치는 돈이었다. 그러다 보니 춘자가 은행원이 된 뒤에도 집은 여전히 가난했고, 두 명의 오빠와 언니의 희생은 계속되었다.


물론 달라진 것은 있었다. 그것은 오직 춘자의 얼굴이었다. 타력 탈출로 작전을 바꾸고부터 춘자는 제 얼굴을 가꾸는데 월급의 대부분을 썼다. 아침마다 단골 미용실에 들러 잠시 뒤 결혼식을 올릴 여자처럼 꾸미고 출근을 했다. 여기에다 날마다 귀걸이와 목걸이를 바꿔 가며 멋을 부렸다.


생긴 것이며, 막 뒹굴며 자란 것 치고는 살성이 민감해 가짜 귀걸이나 목걸이를 하면 피부에 트러블이 생겨, 꼴에 순금이 아니면 멋을 내기도 어려웠으니 이래저래 들어가는 돈만 많았다. 살성까지 받쳐주지 않다 보니 어떤 달은 제 월급으로도 모자라 신발 밑창 붙이는 공장에 다니는 언니가 벌어온 본드 냄새나는 돈을 가져다 쓰기도 했다.


날마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출근해서는 미리 점찍어 둔 돈 많고 잘생기고 젊은 사내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정성을 다했다. 하지만 춘자가 점찍은 돈 많고, 젊고, 잘생긴 사내들은 한데 모여 지들끼리 약속이나 한 듯 춘자에게 관심이 없었다. 관심을 가지는 것들이란 나이 많고, 못 생기고, 돈만 많은 늙은이들 뿐이었다.


어느 날 춘자는 거울 속의 자신을 들여다보면서 무엇이 문제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문제가 많았다. 찢어진 작은 눈과 튀어나온 광대뼈는 아무리 화장을 하고 머리 모양을 멋있게 한다 해도 감춰질 것이 아니었다. 그나마 춘자의 강점은 키 164센티미터에 몸무게 54킬로그램이라는,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늘씬한 몸매였는데 안타깝게도 직업 특성상 고객들에게 자신의 몸매를 보여줄 기회가 거의 없었다.


‘작전을 바꾸어야 하나?’


이런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던 어느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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