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동아줄
출근은 했지만 온통 딴 생각으로 가득 찬 춘자의 머리는 속된말로 장식처럼 달려 있고 손만 습관적으로 움직여 일을 처리해 나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고객이 돌아가고 난 뒤 거스름돈이며 통장을 주고받을 때 사용하는 바구니에 웬 종이쪽지가 놓여 있었다.
‘뭐지?’
춘자는 얼른 고개를 들어 보았다. 등을 보이며 막 은행 문을 나서고 있는 사람은 노랑머리 외국인이었다. 춘자가 얼마간의 교육을 받고 창구에 앉아 일을 시작했을 때부터 가끔 나타나 미국으로 꽤 많은 돈을 송금하는 사내였다.
노랑머리는 한국말을 전혀 못 하는 눈치였고, 춘자도 영어라곤 예스 노 땡큐 정도만 아는 처지라 당연히 말을 섞어본 적이 없었다. 돈을 받아 처리해주고 전표를 돌려주는 단순 업무만 되풀이했다. 하지만 서양 남자인 데다 할리우드 영화에 나오는 배우처럼 잘생긴 탓에 노랑머리가 오면 몰래 쳐다본 적은 많았다. 바로 그 노랑머리가, 누군가 대신 써준 것이 분명한 쪽지를 놓고 갔던것이다.
‘만나고 싶습니다. 토요일 오후 3시 라스베가스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얼른 은행 밖으로 뛰어나간 춘자는 저만치 가는 노랑머리를 향해 소리쳤다.
“저기요, 저기요!”
노랑머리는 부끄러워 그런지 춘자의 목소리를 들었을 것 같았는데도 더 종종걸음을 치더니 이내 사라져 버렸다. 라스베가스는 춘자가 근무하는 은행에서 걸어 5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유명 서양식 레스토랑이었다. 이 노랑머리가 지금 춘자 남편 역할을 하고있는 바바킴이다.
바바킴은 88올림픽을 앞두고 주 경기장 조명 공사에 참여한 미국인 기술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서양 사람치고는 키가 크지 않았지만(그래도 175센티미터는 넘었다) 잘 생긴 데다 너무나 착하게 생겨 사실 춘자는 은행에서 노랑머리를 처음 봤을 때부터 호감을 가졌다.
하지만 인종적 열등감 때문에 자신을 탈출시켜 줄 후보군에 감히 넣을 생각을 못 했다. 만약 서양 사내들이 한국 사내들과 달리 쌍꺼풀이 없고, 광대뼈가 튀어나온 까만 머리 여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노랑머리를 본 즉시 그의 재무 상태를 파악해 후보 1순위에 올렸을 것이다.
라스베가스에서 바바킴을 만나 함께 칼질을 한 다음부터 춘자와 바바킴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바바킴은 춘자가 설정해 놓은 타력 탈출 프로젝트를 완벽하게 성공시켜 줄 최적의 조건을 갖춘 남자였다. 돈이 많았고, 잘 생겼고, 젊었으며 마음씨도 착했다. 다만 외국인이라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렸다. 그렇지만 흑인이 아니라 잘생긴 백인인 데다, 세계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인 미국 사람이었기 때문에 따지고 보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리저리 혼자 저울질하던 춘자는 어느 날 바바킴에게 결혼해 미국으로 가자고 했다. 사실 춘자는 바바킴이 먼저 미국으로 함께 가자는 말을 하기를 오매불망 기다렸다. 하지만 바바킴은 전혀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만나기만 하면 입안의 혀처럼 춘자를 위해 주고, 그러면서도 늘 진지하고 다감 다정했던 바바킴이었기에 춘자는 자신을 향한 바바킴의 사랑을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렇게 착하고 순진한 바바킴을 타력 탈출의 발판으로 삼으려는 불순한 의도를 가진 자신이 많이 미안했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현실적인 욕망이 너무 강렬했기에 그 미안함을 적당한 변명거리로 그때그때 합리화시키면서 춘자는 바바킴 앞에서 당당함을 넘어 뻔뻔하기까지 했다. 그런 까닭에 춘자는 순진하고 착한 바바킴이 자신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차마 미국으로 같이 가자는 말을 못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미국이란 곳이 마음만 먹으면 오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한 번 떠나면 몇 십년, 어쩌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었다. 더구나 대한민국이 아직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던 때라 아무나 외국으로 갈 수 있는 시절도 아니었다. 사정이 그러했으니 바바킴 입장에서는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그렇다면 바바킴이 용기를 낼 수 있도록 자신이 도와줄 필요가 있었다.
그동안 춘자는 영어 공부를 열심히 했고, 바바킴도 한국말을 배웠기 때문에 그즈음 두 사람은 간단한 의사소통을 넘어 원시적인 수준의 정신적 교감도 나누고 있던 터였다. 하지만 개막식을 앞둔 올림픽 주경기장의 조명 공사가 마무리되면서 미국 기술자들이 철수 준비를 하고 있다는 뉴스가 나오는데도 바바킴이 아무 말을 하지 않자 춘자가 먼저 말을 꺼냈던 것이다. 바바킴은 화들짝 놀랐다. 그러고는 더듬더듬 한국말로 말했다.
“춘자, 난 엔지니어야. 전 세계 공사 현장을 떠돌아다니는 게 일상화되어 있다는 뜻이야.”
춘자는 ‘그것이 나의 타력 탈출 프로젝트와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이죠’하는 눈으로 바바킴을 쳐다보았다.
“춘자, 만약 내가 춘자와 결혼한다면 아마 여러 나라에서 여러 번 결혼 했을거야.”
이건 무슨 개 밥그릇 핥는 소리지, 하는 표정으로 춘자가 눈을 멀뚱거리자 바바킴은 친절하게 설명 해 주었다.
“춘자, 춘자는 현지 공사 현장의 걸 프랜드 일 뿐이야.”
이미 마음은 물론이고, 아랫도리와 간과 쓸개도 다 내어주고, 별로 있지도 않은 도덕성에 민족적 자존심까지 다 내팽개쳐버린 춘자로서는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유분수였다. 그동안 바바킴이 보여주었던 한없이 친절하고 따뜻한 사랑은 오직 몇 달 뒤 떼어 낼 수 있는 현지 여자였기 때문이었던 셈이다. 몽둥이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 멍해 있는 춘자에게 바바킴은 아주 결정타를 날려버렸다.
“춘자, 나는 이미 결혼했고, 아이도 둘이나 있어. 아이 엠 베리베리 쏘리.”
막 터널을 벗어나 빛나는 태양을 보았다고 생각했던 춘자는 다시 끝을 알 수 없는 구덩이 속으로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춘자는 말없이 고개를 숙인 채 눈물만 뚝뚝 흘렸다. 혼자 김치국물을 너무 많이 마셔버린 춘자는 집안 식구는 말할 것도 없고 가까운 친구와 주변 사람들에게도 돈 많고 잘 생기고 착한 미국인과 결혼해 조만간 한국을 떠날 것이라고 떠벌이고 다녔다.
춘자가 그렇게 떠벌리고 다닌 것은, 내심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강했기도 했고, 바바킴의 사랑을 의심하지는 않았지만, 마음 한구석에 도사리고 있는, 혹시나 이 남자가 자신을 버리고 떠나면 어쩌나 하는 그런 불안감 때문이기도 했다.
춘자는 돈 많은 미국인과 결혼해 떠난다는 말을 기도문처럼 떠벌이고 다녀야 그런 불안감도 없어지고 현실화의 가능성도 더 높아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 믿음에 기초해 춘자는 바바킴과 사랑이 무르익어 갈 즈음에는 처음 보는 창구 손님에게까지 미국행 이야기를 하면서 적어도 자기 쪽에서만이라도 바바킴과의 결혼을 기정사실화 시켰다.
상황이 이러했으니 만약 바바킴이 그대로 떠나버린다면 타력 탈출 프로젝트를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을까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그때 바바킴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그렇지만 춘자, 춘자는 지금까지 만난 여자들 중에서 최고였어. 이것만은 진심이야. 내가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진짜 춘자를 선택했을 거야.”
고개를 숙이고 있어 바바킴의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목소리에는 진정성이 느껴졌다. 그동안 바바킴을 만나면서 끊임없이 느꼈던 바로 그 진정성과 똑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면 뭐가 달라질까? 그는 이미 마누라와 자식새끼를 둔 개 호로 자식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