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비 인형과 4급 서기관

강력한 초인 후보의 등장

by 우연의 음악

불빛이 일렁이면서 고급 승용차 한 대가 달빛을 받으며 동네 안으로 들어왔다. 잠시 후 용녀네 앞집 마당의 주황색 정원 등이 환하게 켜지면서 주차장에 서 있는 흰색 SUV가 보름달처럼 빛이 났다. 승용차는 거꾸로 된 ‘ㄷ’자 모양의 단지 내 도로를 따라 글래머와 늙은 공주네 집을 차례로 지난 뒤 용녀네 맞은 편 집 마당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노출 콘크리트로 외부 마감을 한 그 집은 마치 방공호처럼 탄탄한 분위기를 풍겼다. 색깔도 방공호처럼 진회색이라 완전무장을 한 군인이 집 앞에 총을 들고 서 있어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았다. 외부와의 접촉을 최소한으로 하고 싶었는지 그 집에는 창문이 별로 없었다. 그나마 있는 창문도 대부분 책받침만 할 정도로 작았다. 집 안에서 격투기 시합을 벌이다 한 명이 골로 가도 밖에서는 전혀 눈치 채기 어려울 것 같았다.


맥주잔을 만지작거리며 젓가락으로 해물탕 냄비 속을 뒤적이던 김구와 글래머는 몸까지 돌려가며 승용차의 움직임을 대 놓고 쫓아갔다. 승용차가 들어선 방공호 집과 용녀네 집은 서로 마당을 마주 보고 있었고, 글래머가 사는 집은 방공호 아랫집인데 단차가 높다보니 두 사람은 올려다봐야 하는 모양새였다.


글래머와 김구는 엄마가 외출한 틈을 타 야동을 보는 중학생처럼 침을 꼴딱꼴딱 넘겨 가며 방공호 집 마당에 들어선 승용차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승용차가 시동을 채 끄기도 전에 방공호 현관문이 열리면서 40대 후반의 여자가 나타났다. 여자는 너무 말라 겨울 나뭇가지에 이불 홑청을 걸쳐 놓은 듯 했다. 몸매와 달리 운동선수처럼 헤어스타일은 짧았고 얼굴도 무척 작았다. 작은 얼굴은 불행인지 다행인지 역삼각형이었다. 여기에 눈은 왕방울만 했으니 얼핏 보면 바비 인형 컨셉의 외계인 같았다.


아무리 반가운 표정을 지어도 좀체 그 느낌을 전달 할 수 없을 정도로 여자의 얼굴은 모나고 깐깐해 보였다. 살이 너무 없어 항온 동물로서의 적정 체온을 유지하는 것이 무척 어려운지 후텁지근한 여름 저녁이었는데도 가디건을 걸친 여자는 잔뜩 몸을 웅크린 채 팔짱을 끼고 있었다.


자동차 문이 열리고 누군가 내렸다. 키가 엄청 큰 사내였다. 보름달 같은 정원 등에 비친 사내의 모습은 군살 없이 매끈한 몸매를 갖고 있었다. 진한 남색 여름 양복을 말끔하게 차려 입은 사내는 긴 다리를 이용해 성큼 성큼 잔디밭을 가로 질러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지연 씨 남편인가 보오.”


김구의 말투는 여전히 조선시대 대감 같았다. 외계인처럼 생긴 바비 인형이라 해야 할지 바비 인형처럼 생긴 외계인이라 해야 할지 모를 그 여자의 이름이 지연인가 보았다. 김구의 말에 글래머도 한 마디 했다.


“진짜 오랜만에 왔네.”

“세종 시에 근무하는 4급 서기관이라 하지 않았소?”

“그렇게 들었는데, 주말마다 온다더니 이번에는 한 달도 더 넘은 것 같은데? 집에 오면 뭐해? 집 안에만 있다가 간다는데. 동네 사람들 중에 지연 언니 남편을 제대로 본 사람이 몇 안 된대.”


글래머는 집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는 바비 인형 남편이 마치 자기가 보기 싫어 그러기라도 하는 것처럼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바비 인형은 여전히 팔짱을 낀 채 현관 문 앞에 서서 마당을 가로 질러 걸어오는 사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글래머의 말처럼 오랜만에 나타난 남편이라면 기쁜 마음에 잔디 마당으로 내려가 반길 만도 한데 바비 인형은 독서실 간다고 해 놓고는 만화방에서 실컷 성인 만화만 보다가 들어오는 고3 아들 보듯 사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차, 여자의 외형적 특성상 그런 표정과 분위기가 최대치로 환영을 표시 하고 있는 것인지, 그것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4급 서기관이면 높은 사람이지 않소?”

“그렇겠지. 근대 정말 키 크네. 180은 훨씬 넘겠다. 윗집 언니 말로는 정우성 닮았다고 하던데, 잘 생긴 것 같기는 하네.”

글래머는 늙은 공주 집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왜? 저런 사내하고 한 번 살아 보고 싶소?“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한 채 내뱉는 김구의 말에 글래머는 눈을 흘기면서 솥뚜껑만한 손을 들어 한 대 때릴 것처럼 폼을 잡았다. 김구는 그런 글래머가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어허-’ 했다.


바비 인형의 마중 같지 않는 마중을 받으며 함께 집 안으로 들어간 사내는 더 이상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아파트와 달리 전원주택은 이것저것 손 볼 것들이 많다. 따라서 주말에만 오는 사람들은, 무엇보다 남자라면 마당에 차를 세워놓고 집 안에 들어가기 전에 집 주변부터 둘러보는 것이 보통이다. 산 짐승이 내려와 마당을 헤쳐 놓았을 수도 있고, 바람에 빗물받이 홈통 같은 것이 떨어져 나갔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육안으로 간단한 점검을 한 뒤 안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금방 다시 나와서는 본격적으로 집 주변을 둘러보는 것이 전원주택 생활자들의 일반적인 태도였다. 사내는 그런 과정이 전혀 없었다. 물론 어두운 밤에 도착해서 그럴 수 있었지만 김구와 글래머가 제법 한기가 느껴질 때까지 마당에 앉아 있었는데도 끝내 재등장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늘 그런 것 같았다.


일하기 싫어하기로 소문난 왕대곤도 그 사이 몇 번이나 마당을 오가며 널브러진 삽자루를 치우고, 쓰레기봉투를 묶어 뒷마당으로 가져가고, 개밥을 주면서 개와 실랑이를 벌였는데 4급 서기관은 왕대곤이 할아비로 떠받들어도 될 정도로 무동형 인간이었다.


하지만 디카프리오는 그 사내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런 사내를 남편으로 둔 바비 인형이 마음에 들었다. 명품을 좋아할 기본적인 조건을 갖고 있는 여자였기 때문이다. 우선 1주일에 한 번씩 남편이 온다는 이야기는 남편이 없는 동안 여자가 심심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그런 여자들은 대개 무엇인가에 집착하는 경향이 강하다. 돈이 많다면 그 집착이 명품에 꽃힐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남편이 집이 무너졌는지, 어디 벽에 금이 갔는지 도통 관심이 없다면 바비 인형과 마주 앉아 있다고 한 들 그렇게 재미나게 해 줄 것 같지도 않았다. 보나마나 집에 들어가자마자 소파에 드러누워 세종 시에서 힘들게 올라 온 여행의 보상을 요구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곤 ‘커피를 타 와라’, ‘맛있는 것을 내 놔라’ 아니면 ‘떡칠 준비나 해라’ 이상은 아닐 것이다.


그런 예의없는 남자의 반응에 짜증이 난 바비 인형이 ‘당신 해도 해도 정말 너무 하네’하면서 톡 쏘기라도 하면, 사내는 오직 편하게 쉬다가 가고 싶은 생각에 ‘옜다, 이거나 먹고 떨어져라’하면서 명품 가방을 하나 던져 줄 것 가능성이 아주 많았다.


바비 인형의 겉모습도 결코 명품을 버거워 할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거의 온 종일 집안에 있다가 남편이 올 때 잠시 얼굴을 드러낸 바비 인형은 풀 메이컵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바비 인형은 디카프리오 입장에서는 강력한 초인 후보였다.


디카프리오는 주말과 토요일을 이용해 바비 인형과 정우성을 닮았다는 그 사내를 좀 자세히 지켜보기로 했다. 용녀네 마당과 마주보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에 가장 물리적으로 가까운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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