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자는 모 유통기업 기자실 구석에 앉아 책상에 놓인 '포럼 협찬 공문'을 가만히 바라봤다. 몇 번이나 따로 미팅을 요청해도 에둘러 거절하던 홍보 전무에게 줄 서류였다. 양기자는 무심결에 서류를 읽다가 '귀사에 무궁한 발전을 기원함니다'라는 첫 줄부터 오류를 발견했다. <귀사에>가 아니라 <귀사의>, <함니다>가 아니라 <합니다>로 쓰여 있어야 했다. '귀사'를 한자로 쓸 걸 그랬다는 부장과 데스크의 말처럼 됐다면 어땠을지 순간 아찔했다.
'딸랑딸랑'
양기자가 서류를 다시 뽑아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는데, 가벼운 종소리와 함께 기자실 문이 열리고 홍보 전무가 들어왔다. 벗겨지기 시작한 앞머리를 애써 감추고 몸에 꽉 끼는 정장을 입은 전무는 줄지어 앉은 기자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살가운 인사를 건넸다.
"김차장, 기사 잘 봤어. 요즘 날아다니더라"
"오기자님, 지난주에 우리 사장님 인터뷰 아주 잘 나왔던데요? 고마워요. 날 잡자고"
"차기자, 오랜만이네. 얼굴 까먹겠어. 자주 와서 나랑도 밥 좀 먹어줘"
드디어 양기자 쪽으로 전무가 다가왔다. 양기자는 얼른 일어나 명함을 주고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오전에 연락드렸던..."
"아, 양.... 기자님. 제가 오전에 미팅이 계속 있어서"
양기자는 서둘러 자리를 옮기려는 전무에게 얼른 서류를 한 장 내밀었다.
"이거 지난번에 말씀드린 포럼 관련해서"
"아, 안 그래도 얘기 듣고 검토 중이었습니다. 박과장, 이거 서류 잘 검토해봐"
전무는 서둘러 양기자의 손에서 서류를 받아 옆에 있던 직원에게 줬고, 직원은 재빠르게 검은 파일 안으로 서류를 밀어 넣었다. 마치 다른 기자들이 보면 안 되는 기밀인 것처럼. 양기자는 긍정적인 대답을 원했다.
"전무님, 잘 부탁드리고 시간 내주시면 제가 방으로 찾아뵙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언제든지요, 연락 주시고. 안 그래도 점심 먹으러 가려고 하는데 혹시..."
그때 직원이 전무에게 귓속말을 했다. 양기자는 확실히 듣지는 못했지만, '지상파', '메이저' 같은 단어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아, 죄송해서 어쩌나. 오늘은 미리 선약이 된 자리여서. 그럼 다음에 꼭 식사 한 번 해요"
전무는 함께 밥을 먹을 기자들과 왁자지껄 떠들며 기자실을 나갔다. 양기자는 점심 약속이 없었지만, 따로 누군가와 밥을 먹을 기분도 아니었다. 양기자는 조용히 쉬려고 자리에 앉아 핸드폰을 봤다. 부장에게 온 부재중 전화가 찍혀 있었다. 양기자는 전화를 걸었다. 부장은 늘 그렇듯, 다짜고짜 물었다.
"뭐래? 한대?"
"공문 전달했고요, 다시 얘기하기로 했습니다"
"한다고 할 때까지 방에서 안 나와야지. 나중이 뭐야, 나중이"
"전무가 계속 미팅이 있어서요, 아까 기자실에 왔을 때 잠깐 얘기했습니다"
부장은 침묵했다. 양기자는 소리 없는 욕설이 귀를 찌르는 듯했다. 3초 뒤 부장이 한숨과 함께 말했다.
"귀하는 대체 취재원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건가?"
그리고 또다시 나오는 한숨과 함께 전화가 끊겼다. 양기자는 속된 말로 '후달렸다'. 뭐라도 해야 했다. 양기자는 얼른 홍보팀에 있는 학교 선배를 찾아갔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져 사무실에는 몇 명 남아있지 않았다. 양기자가 선배를 찾는데 팀장 방에서 고성이 들려왔다.
"온갖 거 다 받아오면 어쩌라는 거야. 예산이 남아돌아? 언론사들 다 갈라 주고 남은 것도 없어. 제발 니 선에서 좀 끊어. 너 이딴 거 한 번 더 받아오면 니 월급에서 깐다. 알겠어?"
고성이 그치자 선배가 힘없는 발걸음으로 팀장 방에서 나와 양기자와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옥상으로 향했다.
옥상에서 보는 하늘은 화창했다. 양기자는 가만히 바깥을 바라보는 선배에게 쉽게 말을 걸지 못했다. 오히려 선배가 먼저 얘끼를 꺼냈다.
"왜? 포럼 그거 때문에? 전무님한테 얘기했어?"
"네, 했어요"
"쉽지 않을 건데. 내가 뭐 도와줄 거 있어?"
"아뇨, 잘 되겠죠"
"잘 안 되면?"
"아니면 마는 거죠"
양기자는 가만히 바깥을 바라봤다. 집에 있는 아기가 보고 싶었다. 낮술이 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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