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각쟁이의 변론

사소하게, 점차 나아지는 게 아니라 계속 살아가는 것을 목표로 하는 세계

by 댜니

지난 해 브런치 목표는 글 10개 발행하기 였다. 발행글 10개부터 분석을 해준다나 뭐라나. 그걸 누가 못해. 했지만 안녕하세요, 제가 바로 그 누입니다. 어이쿠야. 9개를 발행한 시점에서 한 달 정도의 여유가 남았지만 2021년의 새로운 글을 쓸 마음이 도저히 생기지 않았고 그렇게 9개에서 멈춰버렸다.


모두가 신년 글쓰기에 몰입하던 1월 1일에도 마찬가지였다. 나도 거창하진 않지만 새해 목표에 대한 글을 써볼까 싶었지만 오늘은 1월 9일. 아직 늦었다고 하기에는 이르지만 기한을 맞췄다고 하기에는 늦은 날짜. 작년 말부터 올해 초까지 지키지 못할(사실 "않을"인지 "못할"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목표를 세우고 역시 지키지 못하며 이렇게 얼레벌레 굴러가고 있다.


하지만 이 지각쟁이는 브런치 목표치를 달성하지 못했다고 좌절하지도, 1월 1일 맞춤글을 쓰지 못했다고 자책하지도 않는다. 또한 얼렁뚱땅 흘러갈 2022년 속에서 몇 개나 달성할지 모를 To do List에 인생을 끼워맞출 생각도 없다. 안 되면 다음 해에 하면 되지. 다음 해에도 안 되면 그냥 난 그걸 할 생각이 없는가보지. 나는 분명 올해의, 이번 달의, 오늘의 목표를 잡아두고 이루지 못하면 하루의 비어있는 시간들을 되새기며 질책하는 사람이었는데. 그런 사람이 이제 지각쟁이가 다 되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KakaoTalk_20220109_094643795.jpg 올해의 To do List 일부


심리학도들끼리 모여 만든 스타트업에서 초기 멤버로 활동했던 적이 있다. 우리에게는 익숙한 개념을 어떻게 쉽게 이해시킬 수 있을지, 어떻게 컨텐츠로 녹여낼지, 어떤 새로운 아이템을 만들지 고민하는 시간은 퍽 즐거웠다. 자연스레 학부 시절에도 보지 않던 논문도 읽고 그저 외우기만 했던 개념을 새로 익히며 실생활과 연결하기도 했다.


이 때 만들어 유튜브에 업로드한 영상이 "습관성형"에 대한 영상이다.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습관성형 영상의 인기에 우리도 편승해보자! 는 아니었고 공부하던 와중 '조건적 보상의 동기 저하'라는 한 구절에 꽂혀버리고 만 것이다. 시험 범위였을 것이 분명하지만 시나공 공부법에 의해 스쳐지나갔을 문장 하나로 이 논문, 저 논문, 이 아티클, 저 아티클을 뒤져가며 10분 분량의 영상을 만들었다. 출연과 촬영 빼고 대부분 내가 만든 나의 자랑스러운 첫 작품이 되겠다.


습관성형 2편 썸네일.jpg 이제는 유튜브에서 내려가 나만 가지고 있는 영상의 썸네일


많은 감독들이 작품에 자신을 투영하듯 나도 내 작품에 나 자신을 투영해 만든 기억이 있다. 이렇게 말하면 거창하지만 결국 내 습관과 나의 행동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는 소리일 뿐이다. 이 습관 성형 영상은 결국 '목표를 세우지 말자'라는 아이러닉한 결과를 말하고 있다. 우리는 매해 목표를 달성하지 못해 좌절하고 매년 초 새로운 의지를 다지며 살아간다. 나는 이것이 좌절이 동력이 되는 삶이라고 생각했다.


매해 정확한 목표를 만들고 그 이외의 것들을 모두 실패의 자리로 마련해놓는 아주 가차 없는 규정. 그리고 그 규정을 엄격하게 지키기 위해 매해 좌절과 절망을 반복하며 스스로를 나약한 사람으로 내모는 참가자들. 나는 그런 잔인한 삶 속에서 목표치가 주는 특별한 결과물을 위해 내달리고만 있었다. 책을 10권 읽기로 했으면 한 해의 마지막 날 억지로라도 한 권의 책을 마지못해 읽고, 50kg대에 진입하기 위한 목표에서 아슬아슬하게 60kg 대를 유지해버린 본인을 한심해하는 사람. 한 해의 목표치를 100개 써놓고 하나를 지워갈 때의 기쁨에 앞서 남은 것들에 대한 책임감이 우선인 사람이 어디 나 뿐일까.


목표를 위한 목표를 세우고 결과가 주는 잠깐의 희열에 목을 매는 사고방식, "만약 이런 행동을 하면 이런 결과를 얻을 수 있을거야"같은 If-Then 사고 방식은 보상을 바라는 마음이다. 사람인 이상 보상을 바라는 건 당연하지만 우리는 누구도 주지 않을 보상을 기대하며 매년 새해마다 목표설정을 반복하고 있다. 살이 빠진다고 어떤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책을 많이 읽었다고 특별한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그 이후의 삶은 또 우리가 결정해 나가는 것 뿐이다.


행동을 바꾸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목표를 설정하는 건 분명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 된다. 하지만 외부보상은 때로 장기적인 행동 변화에는 유의미한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또한 이러한 목표는 결국 결과를 성공, 실패로 판가름하게 만든다.


나는 더이상 실패로 가득찬 삶을 살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성공으로 가득찬 낭만적인 삶을 바라는 것도 아니다. 나는 지속가능한 삶을 살고 싶다. 사소하게, 점차 나아지는 게 아니라 계속 살아가는 것을 목표로 하는 세계에서 살아가고 싶을 뿐이다. 때문에 나의 To do List에는 지난 해에 해봤을 때 기분이 좋았던 것들 위주로 쓰여있고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것들이 대부분이다. 자기계발이라는 이름 아래에 나를 채찍질 해야만 되는 것들은 애초에 쓰지도 않았다. 그건 차근차근 해내가면 되는 일이지 꼭 해야만 한다고 강박을 주면 또 죽어갈 게 뻔하니까.


이 영상 하나가 나를 바꿨다고 말할 수는 없다. 쥐띠 해에 만든 영상 이후에 몇 해가 지나가면서도 나는 달라진 것 거의 없이 강박적이고 완벽주의적인데다가 외부 환경에 예민한 그대로이다. 그럼에도 내가 만든 내 영상이 내가 지켜야 할 선을 만든 것은 분명하다. 더 이상 목표라는 이름으로 나를 괴롭히지 말자는 일종의 다짐이나 선언같은 영상임에는 틀림없다. 나는 앞으로도 더 많이 지각을 할 것이고, 더 많이 포기하거나 시작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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