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를 믿지 못하는 만큼 세상을 믿지 않았다.
경험해보지 못한 것들은 쉽게 불신으로 다가온다. 얕게 경험해본 결과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세상의 격언들을 항상 의심했고 내가 겪어보지 못한 것들의 후기 또한 믿는 것을 경계했다. 나는 나를 믿지 못하는 만큼 세상을 믿지 않았다.
3개월 전 운동을 시작했다. 신체의 사용기한은 아직 몇 십년이나 남았는데 벌써부터 여력이 남지 않았다는 기분이 들었다. 늦게나마 운동으로 배터리 용량을 채워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단지 그 뿐이었다. 심신일원론을 배우지만 나는 건강한 신체를 가졌을 때에도 건강한 정신을 가지지 못했으므로 운동의 효능을 내 신체 사용기한을 늘리는 용도만으로 여겼다.
운동은 재미있었다. 예전부터 헬스를 해보고 싶었다. 큰 근육과 폭발적인 힘같은 것들을 은근히 동경해왔다. 단순한 동작들에서 나오는 복잡한 생화학적 변화들. 중량을 올려가면서 짧고 굵게 근육을 자극하는 자세들. 다치지 않기 위해, 더 좋은 퍼포먼스를 내기 위해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순간. 그 순간들이 모이다보면 어느 새 한 시간, 두 시간이 지나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이 지나면 다시 잡념이 밀려왔다. 역시, 그럴 줄 알았지. 놀랍지도 않았다. 약간의 실망감도 들지 않았다. 내 정신의 역사는 이미 20년이 걸려 쌓여온 것들이었는데 한 시간, 두 시간만으로 말끔히 지워버릴 수 없는 것이었다. 단순히 힘들다, 그만 하고 싶다, 재미있다, 더 해보자 하는 순간의 활력만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우울과 상념들이었다. 몸의 피곤함으로 깊은 잠을 자는 날보다 몸의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제멋대로 날뛰는 정신 덕분에 감았던 눈을 뜨는 날이 더 많았다.
어쩔 수 없는 환경 탓도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쉽게 다니던 계약직을 2달만에 뛰쳐 나오고 두 달간 학원에 다니다 다시 준비하게 된 취업 준비. 1살을 더 먹었다는 조급함과 지금까지 쉽게 서류조차 통과하지 못한 나의 포트폴리오, 더 겁나는 면접 준비같은 것들이 나를 압박하고 있었다. 서류 몇 개가 통과되었지만 면접의 결과는 모두 낙방이었다. 분위기가 좋다고 생각했던 것들도, 꼭 들어가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들도 전부 빠짐없이 낙방이었다. 작년 첫 면접 때 '지금의 면접은 분명 서류 탈락만 일삼던 나에게 꼭 가고 싶었던 목적지'라는 생각으로 나를 다독였다. 그렇게 생각하면 나는 분명 더 나아졌는데 작은 성취를 몇 개나 이루었는데도 나의 자존감은 여전히 불안하게 흔들렸다. 운동으로는, 작은 성공으로는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것들의 연속이었다.
그럼에도 해야만 했다. 매일 이상한 꿈에 시달리다가 새벽에 깨버린들 운동에는 나가야 했고 이 서류와 면접의 결과가 나를 고양시키지 못해도 지원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나의 목표는 운동으로 잡념 떨치기, 작은 성공으로 자존감 높이기 따위가 아니었다. 그냥 해야지. 기대도 없이 절망도 없이 그냥 해야하는 오늘의 일정이었다. 믿음은 없으나 오늘 해야하는 숙제를 하는 착한 어린이처럼 그저 내 유일한 자랑거리인 성실함을 드러낼 뿐이었다.
그런 오늘의 일정이 반복되어 3개월이 지났다. 믿지 못한 것들의 결과가 성적표처럼 드러나기 시작했다. 세상은 냉정한 듯하면서 다정해서 쉽게 불신하는 나에게도 꽤 자랑스러울 결과를 내주었다. 단순히 많이 먹어 생긴 살인 줄 알았던 것들이 근육 증량이었고 전부터 가고 싶었던 회사의 꼭 하고 싶은 직무에 최종 합격을 했다. 운동은 더 재미있어졌고 내일은 첫 출근이다.
세상이 무너질 것만 같던 걱정들은 그저 내 몸이 제대로 기능했으면 좋겠다는 소망으로 대체되었고 밥 벌어 먹고 살기 어려울 것만 같았던 불안은 어쩌면 내게 작은 재능이라도 있지 않을까하는 희망으로 변했다. 운동으로 잡념이 사라졌고 작은 성취로 자존감이 생겨났다. 전부 믿지 않았던 것들이었는데 말이다.
아직도 세상의 모든 격언과 경험들이 나에게 정확히 맞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노력은 배신당하고 믿음도 꺾이는 순간들을 목도하고 경험해보았기에 여전히 의심하고 있다. 여전히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큰 힘은 운이라고 생각하고 모든 터닝 포인트는 우연에서 시작되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결과는 분명히 다가오고 그것의 인과를 어디에 붙일 것인지는 본인의 몫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것이 믿음에서 시작됐든 아니든 결과는 다가온다. 좋은 결과를 기대하든 기대도 실망도 없는 무념무상이든 결과가 다가온다는 것만은 바뀌지 않는다. 그저 해나간다면 무언가가 되어있게 된다. 좋은 쪽으로, 혹은 나쁜 쪽으로.
다시 한 번 세상의 법칙은 냉정하면서도 다정하다. 결과는 랜덤할지언정 빈 선물상자를 주지는 않는다. 작을지도 클지도, 호불호가 갈릴지도 모르나 무슨 결과는 주어진다. 그냥 해보자. 기대하든 하지 않든 그냥 해보자. 세상이 나에게 어떤 선물을 준비하고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