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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란 Oct 06. 2018

은둔형 오후

유계영 시인


은둔형 오후 / 유계영




맑은 날 비가 내리면 창밖을 봐주기를 염원하는 누군가의 기도가 통했다는 것

거울은 긴 팔로 방의 꼭짓점들을 끌어안고 있다

아무와도 연결되지 않은 핸드폰을 만지며

울고 웃는 한 사람을 지켜주려고


거울의 관심은 오직 자신뿐이지 그러나

은둔자의 관심사는 오직 외부에 있기 때문에

둘은 오랜 우정을 쌓을 수 있었다


자나 깨나 자신만을 비추는 거울을 문득 극복해보고 싶은 것이다

이렇게 맑은데도 비가 내리기 때문에

은둔자는 거울을 떼어다 골목에 내놓았다


가져가면 필요하시오 누구든 필요하시오

환영은 아무나 합니다


그는 방으로 돌아와

네개의 꼭짓점을 158개씩 겨누고 있는 서적들을 바라본다

그 위로 작고 부드러운 먼지들이 가라앉는다

거울의 민감한 팔에 붙잡히지 않으려고 둥둥 떠다니던

사각형의 책상과 침대

의외로 육각형인 강아지 얼굴

인중이 뭉개질 때까지 콧물을 훔치게 했던 피크닉의 기억이

바닥에 잘 붙어 있는 것을 바라본다


허술한 태양이 자신의 꼭짓점을 놓칠 때

맑은 날 비가 내렸다


사선으로 내리는 비는 누군가 기도 중이라는 의미일까

저주가 기도의 내용으로 부적격하지 않다면


우산의 어설픔 때문에 온 얼굴이 침 범벅인 행인들 사이에서

거울은 빗방울을 속기하고 있다

자신을 다시 주워오기 위해 헐레벌떡 뛰어올

한 사람을 지켜주고 싶어서




월간《시인동네》 

2018년 8월호


나는 그래

아픔을 혼자 삭이는 이들에게 비는 따뜻한 위로일 거란
웃긴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구석에서 혼자 울고 있는 내가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당신에게 비가 어떻게 내릴지는 모르겠으나,
소나기는 위로가 필요한 이들의 몫이 아니다.
멋진 한 장면을 위해서 잠깐 동안만 내려야 하는 그들의 숙명을, 슬픈 당신은 이해할 수 없을 테니까.
 

나는 비를 맞는 것보다 보는 것을 좋아한다.
어떠한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을 선호한다.
때론 가만히 있는 것이 나의 눈물을 다시 채워줄 동기부여가 된다.
홀로 일어설 수 있는 발판을 닦아주는 것과 같다.
물론, 창문 밖으로 내리는 비를 보고 '우울하다' 말한 적은 없으나
그렇다고 '참 좋은 날이다'라고 생각한 적도 없다.  
누구는 우울증이라 한다. 나는 은둔형이라 한다.

판타지 이야기의 결말엔 항상 비가 내린다.
차가운 빗방울 하나가 주인공의 참회의 눈물로 둔갑하는 그런 어처구니없는 장면으로.

당신은 뭐든 혼자 해내야만 한다. 어쭙잖은 효과 말고, 눈길 말고, 위로는 더더욱 말고.
방안에 있는 거울이 그대를 보며 외롭지 않다 말하는 이유를 따스한 입김으로 착각하지 말고.
맑은 날 비가 내리는 희한한 장면을 보고 자신의 눈꺼풀을 깜빡거리지 말고.
당신도 모르게 비는 홀로 할 수 있는 일은 물론이고, 할 수 없는 일까지도 죄다 실천한다.

비는 바쁘다. 거울은 게으르고, 타인은 아무것도 모른다.


은둔자의 방안에는 은둔자만 있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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