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지은 시인
임지은
종이 위에 돼지를 올려놓으세요
일요일입니다, 아직 겨울입니다 같은 문장은
돼지에게 좋은 먹이가 됩니다
돼지를 깨우기 위해선 맛있게 인사를 해야 합니다
안녕을 음미할 수 있게
주변의 관계들은 지우세요
이제 돼지가 발을 빼지 않도록
내용물을 찐득하게 만들 차례입니다
다디단 단어들의 향연
제발, 진짜, 너무 같은 부사들은 돼지에게
달라붙어 불에 탄 향기를 냅니다
너에게 좋은 냄새가 날 거야
진흙을 고루 바른 돼지가 종이에
온몸을 문지릅니다
이런! 돼지가 지나간 자리마다
해서는 안 될 말들이 쓰여 있군요
당신이 카드를 열면
광기로 물든 돼지 한 마리가 뛰어다니고
깜짝 놀란 입꼬리는 내려오질 않고
자, 돼지를 사로잡는 법에 성공했습니까?
의심이 많은 생각은
반으로 접히지 않습니다
계간 《모:든시》
2018년 가을호
나는 그래
숨죽여 말해도 타인의 성질을 긁을 수 있다는 건, 참 반가운 소리다.
굳이 전염병처럼 옮기지 않아도 나의 감정을 표출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나는 쓰는 것보다 말하는 걸 좋아한다.
언어가 가진 힘은 인간의 입에서 나오기 때문에,
사실상 산발적으로 돌아다니는 단어들은 전혀 쓸모없다.
오히려 돼지로 카드를 쓰는 일은 막 뻗어나가려는 의심의 싹을 자르는,
비효율적인 행위일 뿐이다.
의심은 많을수록 좋다.
믿음을, 신뢰를 깨기 쉬워서 그런 게 아니다.
숨어 살지 않아도 될 만큼
모두 다 같은 냄새를 풍길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 좋은 냄새를 구별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모두 똑같은 병을 갖고 있으니까.
단지, 서로 알아볼 수 있는 취향이 확고해질 뿐.
돼지를 잡아도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니, 동족을 가둬서 뭘 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