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한 스승은 존재하는가?

B#5-1 / 영화 속 스승과 제자를 통해

by 우란


무지한 스승은 존재하는가?

- 영화 속 스승과 제자를 통해




* 일방적인 관계로 출발한 스승과 제자


한국 사회에서 교권이 강했던 시절엔 ‘스승과 제자’ 관계는 일방적이었다. 완벽한 수직관계로 이루어져 제자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거친 반항뿐이었다. 선생님들은 스스로 자신을 ‘이상적인 스승’이라 불렀다. 또한 학생들에겐 ‘위대한 나’의 제자라 명시했다. 스승은 제자들의 선망 대상이어야 했으며, 이타적 선인과 같은 인물이어야 했다. 스승이 제자들에게 제시하는 길은 사회에 완벽하게 적응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었다. 스승은 자신의 방식을 최고의 교육법이라 정의하고 제자들의 삶에 무분별하게 개입하곤 했다. 따라서 체벌과 정신적 폭력은 자신의 길을 이탈하는 제자를 위한 정당한 교육방식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현실을 담아내는 창구라 불리는 영화 속에서도 이는 리얼리티하게 드러났다. 한국영화 속 선생님들의 주요 일과가 학생들의 엉덩이를 있는 힘껏 걷어차는 일이나 종종 학생들의 머리카락과 귀를 잡아당기고, 싸대기를 때리는 일로 이뤄져 있었으니, 그 당시 현실은 더 폭력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말죽거리 잔혹사>와 <강남 1970>의 유하 감독은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유하감독.jpg 출처: <맥스무비> 유하 감독 인터뷰, http://news.maxmovie.com/10874, 2006.06.05
교복을 입고 굉장히 슬픈 표정을 한 풍채 좋은 고등학생이 상상된다. (…) 자살하고 싶을 만큼 참 많이 맞았다. 가만히 있어도 키가 크니까. 학도호국단 해라, 선도부 해라, 하는데 안 하니까 막 맞았다. 선생님들도 이유 없이 많이 때렸다.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캐비넷에서 맞은 것도 나다. 허허. 아프다기보다 모멸감이 들었다.

- 나원정, 「<강남 1970> 유하 감독 ① “1970년대에서 건진 우리 시대의 절망”」, 『맥스무비』, 2015.01.29, http://news.maxmovie.com/129995#csidx13d0470446e68a2b2d2c963e3df1afd, 2018.11.04.


유하 감독은 “3년 내내 모멸감을 갖고 학교를 다니면 일그러진 상상력이 펼쳐진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거리3부작(<말죽거리 잔혹사>, <비열한 거리>, <강남 1970>)의 탄생배경을 설명했다. 특히 감독의 고교 시절의 경험이 투영된 <말죽거리 잔혹사>는 유신 시대를 배경으로 당시 폭압적이었던 학교 제도를 비판하는 동시에 그 잔인함이 결과적으로 ‘인간의 폭력성’ 분출로 확대되었음을 날카롭게 제시한다.


스승의 이러한 강압적 교육방식은 제자들의 배움에 대한 순수한 열망과 의지를 박탈했다. 권위적인 스승을 향한 제자의 반항은 결코 긍정적인 효과를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제자들의 거친 반발은 모두 그들 자신의 업보로 돌아갔다. 말 그대로 누구도 스승의 권위에 도전할 수 없었다. 그 말은 누구나 스승이 될 수 없음을 의미했다. 자크가 말하는 스승의 이상적인 역할을 논할 수도 없었던 시대였다.


『무지한 스승』 속 무지한 스승의 출현은 결코 불가능했으며, 이는 곧 학생이 스스로 사고하고 행동할 수 없음을 당연시하는 사회문화가 만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참 아이러니한 점은 그 와중에 스승의 날만 되면, 수많은 제자가 <스승의 은혜> 노래를 부르며 따뜻한 스승님을 떠올린다는 점이다. 물론 모든 스승이 폭력적이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시절에 ‘무지한 스승’이 존재했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 완벽하지 않은 스승과 자아를 찾아가는 제자


과거 스승과 선생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선생의 비도덕적, 비인간적 문제가 사회 수면 위로 올라오면서, 교권은 사회‧정치적으로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중심 사안으로 대두되었다. 누구도 침범할 수 없었던 교권의 권위는 학생의 ‘인권수호’ 강화로 인해 무너졌다. 나아가 학생의 인권이 인간의 ‘자유’와 연결되면서 사람들에게 이를 억압하고 박탈하는 ‘폭력’으로 인식된다. 반면 ‘스승’은 여전히 존경스러운 나만의 선생님으로 남게 된다. 폭압적인 선생과 정의롭고 인간적인 스승의 경계가 명확하게 분리되었다. 스승의 날의 스승은 지식만이 아니라 삶의 지혜까지 가르치는 위대한 사람으로, 비로소 완벽한 정체성을 갖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회 현상은 영화 속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단순히 마음이 따뜻한 스승이 아니라 인간적인(인간의 불완전성), 그러니까 완벽하지 않은 스승이 등장한다. 스승은 인생의 굴곡을 겪으며 얻은 삶의 교훈을 제자에게 전달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한다. 아픔을 숨기고 있는 제자를 위한 스승의 고군분투는, 서로에게 수직적인 권력 구조에 의한 관계가 아닌 이상적인 관계로 인식된다.


죽은시인의 사회.jpg 출처: <죽은 시인의 사회> 스틸컷


영원한 우리 마음속의 캡틴을 탄생시켰던 피터 위어 감독의 <죽은 시인의 사회>(1990)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명문학교에 새로운 영어 교사로 온 존 키팅은 기존의 교육방식을 뒤집어버린다. 학생들에게 교과서가 아닌 밖으로 나가 직접 경험함으로써 인생을 배우도록 한다. 까르페디엠을 외치는 존 키팅의 수업을 통해 학생들은 난생처음으로 자유를 맛보게 된다. 그들은 그동안 숨겨왔던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거침없이 행동하기 시작한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한 뼘 더 성장한다.


크리스토머 파라티에 감독의 <코러스>(2005) 속 임시직 교사 마티유 역시 학생들에게 노래를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닫힌 마음을 여는 데 성공한다. 어린아이들의 상처는 선생님의 노래 교실로 인해 치유된다. 이한 감독의 <완득이>(2011)엔 똥주(선생님)가 등장한다. 완득이를 지겹도록 따라다니며, 그의 인생에 시시콜콜 참견하는 선생님이지만, 완득이를 어둠에서 끝까지 꺼내줄 사람은 그밖에 없다. 윤종찬 감독의 <파파로티>(2013)에도 똑같은 스승과 제자가 등장한다. 잘나갔던 성악가 성진과 건달을 주 업무로 삼고 있는 고교생 장호의 콩쿠르 입상 도전기가 주된 이야기다. 유일하게 보통 사람답게 하는 것은 노래를 부르는 것이 전부였던 장호는 성진의 도움으로 성악가로서 자신의 미래를 다시 세우는 데 성공한다.


지금까지 소개한 모든 영화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것은 ‘완벽하지 않은 스승과 스스로 나를 찾아가는 학생’이다. 존 키팅과 마티유는 엄밀히 말하면 보편적인 선생님이 아니다. 여기서 보편적인 선생님은 앞서 언급했던, 강압적인 수업방식으로 교권의 권위를 세우기에 바쁜 선생을 말한다. 두 사람은 다른 선생님들에게서 철저하게 외면 받는 외톨이들이다. 그들의 교육방식은 언제 어디에서나 천대받는다. 따라서 그들은 과감히 동료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을 포기하고,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살지 못하는 학생들과 함께 뒹구는 것을 선택한다.


완득이.jpg 출처: <완득이> 스틸컷


똥주와 성진 역시 마찬가지다. 똥주는 선생님임에도 불구하고, 생필품을 지원받는 완득이 옆집에 살만큼 가난하고 꾀죄죄하다. 물론 스스로 선택한 길이지만, 그가 걷는 길엔 온갖 고난이 함께한다. 그런데도 완득이가 그를 무시하지 않는 이유는 자신의 생활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봐왔기 때문이며, 선생님의 오지랖 속에 애정이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들리는 똥주의 잔소리는 완득이를 계속해서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완득이가 도로 위에서 달리기한 후 환히 웃는 모습으로 영화는 끝난다. 이 장면은 그가 앞으로도 치열하게 성장할 것임을 예상하게 한다. 학생의 의지가 끈기로 계속될 것임을 알 수 있다.


파파로티.jpg 출처: <파파로티> 스틸컷


영화 <파파로티> 속 어린 나이에 벌써 형님 소리를 듣는 건달 장호의 유일한 고민은 어떻게 하면 더 노래를 잘 부를 수 있느냐다. 반면 한때 잘나가는 성악가였던 성진은 시골 촌구석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며 무료하게 살고 있다. 유망주였던 그가 시골로 내려오게 된 것은 노래를 부르다 멈춰버린 그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결점은 장호로 인해 치유 받는다. 장호는 성진을 통해 새로운 미래를 꿈꾼다. 두 사람은 서로의 결점을 채워주면서 함께 성장한다.




영화 속 4명의 스승은 무지한 스승인가?


그렇다면, 이 영화들 속 스승은 과연 자크가 말하는 무지한 스승이라 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깊게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자크는 무지한 스승을 정확하게 규정하고 있지 않다. 그가 말하는 스승의 보편적 가르침이 모두 영화 속 스승들에게 나타났는가? 딱 잘라 구분하고 규정할 수 있을까?


답은 동전의 양면성을 띠고 있다.
4명의 스승은 무지한 스승인 동시에 무지한 스승이 될 수 없다.


먼저 동전의 앞면이다. 무지한 스승을 좁은 시각으로 본다면, 영화 속 스승들은 무지한 스승과 반드시 구별되어야 한다. 무지한 스승의 앎은 4명의 스승이 가진 삶의 교훈과는 다른 선상에 있다. 무지한 스승의 지식은 물질적이다. 무지한 스승은 새로운 정보를 꾸준한 학습에 의해 쌓아도 학생에게 주입하지 않는다. 스승의 앎이 절대적 지능은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 4명 스승의 교훈은 다분히 정신적이다. 이들의 지식은 일상생활과 깊게 관련된다. 도전과 실패를 통해 얻는 ‘경험’이 제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자산이다. 따라서 스승들은 꾸준히 제자의 곁에서 행동할 것을 주문한다. 물론 정신적으로 치유를 받는 것이 제자들의 원초적인 목적이다.


그렇다면, 다시 생각해보자. 무지한 스승의 지식과 4명 스승의 삶의 교훈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모호할 수밖에 없다. 무지한 스승은 오로지 설명할 뿐이다. 길을 제시하는 게 아니라, 그 길을 발견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조언하기만 할 뿐이다. 자크의 무지한 스승은 자신의 방대한 지식을 전달하는 것보다 학생들이 스스로 자신의 지능을 사용해 결정하고 문제를 해결하기를 바란다. 본래 무지한 스승의 역할은 ‘제자(학생)에게 지식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의지를 심어주는 것’이다. 이는 자크가 자코토의 언어를 빌려 주장하는 진정한 인간의 ‘해방’을 향한 첫걸음이다.


동전의 뒷면을 보자. 무지한 스승은 양면적인 뜻을 지니고 있다. 스스로 배울 수 있는 학생의 가능성을 알기 때문에 지식을 알려주지 않는 무지함과 학생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동안 쌓아둔 지식이 전혀 없는 무지함을 모두 의미한다. 좀 더 깊게 생각해보자.

무지한 스승의 ‘보편적 가르침’은 무엇인가. 스스로 생각하고 배우는 방식을 설명해주는 것이다. ‘직접’, ‘스스로’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는 교육방식이다. 즉, 4명의 스승이 어떤 방식으로 무엇을 제자들에게 전달하고 설명하느냐보다, 이를 받아들이는 제자들의 반응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애초에 지식을 물질적, 정신적으로 구분할 필요가 없다. 자크가 무지한 스승의 가르침을 비현실적이며, 지나치게 이상적이라 시인한 가장 큰 이유는 ‘확신할 수 없는 학생들의 의지력’ 때문이었다. 그조차도 완벽한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제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학생들의 자발성’이 가장 중요한 요건이다.



그것이야말로 무지한 스승의 올바른 교육법이며 보편적 가르침의 수단이다. 이는 곧 스승이 존재하지 않아도 계속될 것이기 때문에, 학생들은 스스로 해방되면서 인간 정신의 진정한 힘을 깨달을 수 있게 된다.


여기서 자크가 말하는 ‘해방’을 학생들이 찾은 ‘진정한 자아 찾기’라고 해석한다면, 4명의 스승은 무지한 스승으로 통용된다. 『무지한 스승』이 강조하는 ‘해방하는 스승’, ‘학생의 자발성(의지)’, ‘보편적 가르침’, ‘평등한 지능’ 등을 모두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4명의 스승은 스스로 무지함을 알고 있다.


여기서 무지함은 자신의 결점을 인정하는 동시에 배움의 가능성을 깨달은 학생을 향한 꾸준한 조언을 포기하지 않고 하는 것을 말한다.(귀찮고, 힘든 조언도 포함된다) 따라서 4명의 스승은 지나치게 적극적으로 학생에게 다가간다. 제자는 스승과 함께 고군분투하며 스스로 미래를 개척할 수 있는 자신감을 갖게 된다.


코러스.jpg 출처: <코러스> 스틸컷


“오 마이 캡틴!”이라 소리친 <즉은 시인의 사회> 고등학생들이나, 노래를 통해 삶의 가치를 깨달은 <코러스>의 아이들, 불우한 가정사 때문에 짓눌려있던 완득이의 비상과 성악을 통해 ‘나’의 미래를 결정한 <파파로티>의 장호는 모두 자기 삶의 주도권을 가짐으로써 스스로를 가뒀던 환경에서 해방된다. 나아가 그들은 사회적 통합을 이루는 데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될 것을 암시한다.





『무지한 스승』이 주는 이상과 현실


안타깝게도 오늘날 4명의 스승은 자크의 무지한 스승만큼이나 비현실적인 존재들로 여겨진다. 4명의 스승을 보고 “다 영화니까 가능한 거지. 저런 사람이 어디 있어?”란 반응이 지배적이란 얘기다. 교권의 권위가 곧 권력이었던 선생은 여전히 현실에 존재하고, 영화 속 스승들은 좀처럼 흔하지 않다. 또한 교권이 추락하면서 발생한 여러 사회적, 도덕적 문제는 해결될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높아진 학부모의 학구열도 분명 적잖은 악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결정적으로 학생의 일방적인 무관심과 선생의 소극적인 행동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심해지고 있다. 사실상 선생과 학생의 관계를 긍정적으로 볼 수 없는 게 오늘날 현실이다.


그렇다고 무지한 스승이 필요 없는 시대인가? 자크는 지능의 평등에 기반한 무지한 스승의 보편적 가르침이 모든 교육법에 뿌리내릴 순 없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 물론 학생의 의지가 확실하게 전제되어있어야 가능한 이야기다. 이러한 자크의 이중성은 『무지한 스승』 속에 전반적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이 책을 통해 현 시대의 문제점을 결정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그가 확실한 답을 알려주지 못하는 것은 앞서 영화 속 스승을 두고 끊임없이 고민하는 이유와 같다. 다만, 『무지한 스승』을 통해 어렴풋이 정립할 수 있는 요점은 있다.


무지한 스승은 얼마든지 다른 모습과 형태로 존재한다. 영화 속 스승들처럼 말이다. 무지한 스승의 조건과 교육방식을 현재 이상적이라 말하는 스승과 일대일로, 정확히 대입해 비교할 필요가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학생의 지치지 않는 의지가 계속되고 있느냐, 없느냐다. 자크의 말처럼 막연하고, 비현실적인 문제라 생각할 필요도 없다. 무지한 스승은 누구나 될 수 있다. 무지한 인간이라면 가능하다. 반드시 선생이 아니어도 우린 삶 속에서 무지한 스승을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는 얘기다.


자크는 ‘무지한 인간은 자신만의 언어로 어디든 통합될 수 있으며 소통할 수 있다’ 말한다. “그래 나도 화가다!”라 소리칠 수 있는 학생이, 제자가, 인간이 존재한다면, 그걸로 된 것이다.


내가 읽은 『무지한 스승』은 이상과 현실을 구분하는 것을 지양한다. 무지한 스승과 함께 얼마나 많이 도전하고 실패를 맛보았느냐를 묻는다. 독자의 대답이 길면 길수록 자크 랑시에르의 기분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라, 감히 예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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