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성해 시인
저수지가 얼고 그위로 눈이 왔다
맨얼음 위로는 감히 올라가지 않더니
땅과 물의 경계가 없어지자
사람들이 겁도 없이 그 위로 걸어들어간다
얼음판 가운데 서 있으니
내가 오래전에 이 저수지에 빠져 죽은 사람 같다
내 발밑으로 사람을 뜯어 먹고 산다는 잉어 한마리 지나가는가
머리카락이 키를 넘기게 자란 그 여자가 지나가는가
클클거리는 얼음판 밑이
지금은 아우성이고 폭풍 속 같은 데고
얼음판 위는 물 속처럼 적막하다
퍼런 물살 한 조각 신발에 묻히고 걸어나오면
잉여된 목숨을 사는 듯 피가 훈훈히 데워지고
신발코를 하얗게 밝힌 채 사람들이 집으로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주)창비
창비시선 351
문성해 시집, 『입술을 건너간 이름』중
* 나는 그래 *
앞마당을 가로지르고 언덕 밑 포도밭을 헤쳐지나 가면 큰 저수지가 보인다.
누구든 마음으로 품을 수 있는 딱 적당한 크기. 그러나 결코 집으로 가지고 돌아갈 순 없다.
갖은 쓰레기가 둥둥 떠다니진 않지만, 내장 깊숙이 씁쓸할 것만 같은 이끼가 잔뜩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감히 손가락조차 담기 싫은 그런 곳이기 때문이다.
포도밭을 등 뒤로 한 채 저수지를 바라보면 왼쪽으론 황토 모래사장이, 오른쪽으론 물 위로 잔뜩 서로 엉켜있는 이끼를 볼 수 있다.
결국 그들을 향해 고개를 숙이는 꼴이지만, 거길 갈 때마다 난 주저 없이 왼쪽으로만 걷고 또 본다.
이율 굳이 설명하기도 싫지만, 신비스럽기도 하고, 꼭 이끼에게 쫓겨날까 봐 전전긍긍하기 때문이랄까.
즉, 이렇든 저렇든 이끼는 언제나 당당하고 억척스럽게 저수지의 주인 행색을 하고 살고 있다.
그들의 삶의 방식에 대해선 지금까지도 알려진 게 없지만, 정확한 점은 앞으로도 그 자리에서 주인 대접을 받을 거란 확신이 있다는 점이다.
그도 그럴 듯이 누구도 혀를 차지도, 손가락질하지도, 욕하지도 않는다.
당연한 듯이, 동시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그들은 자신을 숨기지 않는다. 그러나 또 그만큼 알려지지도 않아 비밀스러운 관광명소의 주인이 된 지 오랜 세월이 흘렀다. 그저 기다린다.
있는 듯 없는 듯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제 발로 미끼를 무는 낚시꾼들을.
낚시꾼이 자신의 바늘에 걸려들 때까지 기다린 후 쏜살같이 물속으로 낚아채 들어간다.
그리곤 빠져버린 모든 것을 온몸에 잉어의 이빨을 한 채 뜯어먹는다.
조용하게 흔적 없이 서서히.
그래서 언제나 그곳은 마법 같은 곳이다.
매번 사고가 끊이질 않는데, 낯선 낚시꾼이 익숙한 그 자리에서 어깨를 떨며 서 있기 때문이다.
죽지 못해 왔다고도 하고, 내일은 더 나을 거란 희망으로 왔다고도 한다. 그리곤 알지 못한 두려움과 끝이 보인 절망감에 찾아왔다고도 한다.
그리곤 답답했던 자신을 내어 논다.
사실 뜯어 먹힌 자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다.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낚시꾼들은 여전히 그들에게 찾아간다.
이끼가 뭘 먹어치우며 사는지도, 악착같이 저수지 안에 숨긴 것도 뭔지 알 수가 없다.
그 어떤 것도 알고 느낄 수 없는데, 왜 또 찾아가 자신을 버리고 오는 걸까.
오늘도 얼마나 흠뻑 젖은 꾼들이 나를 스쳐 지나갔을까.
그리고 얼마나 많은 이들이 흠뻑 젖은 나를 스쳐 지나갔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