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퇴사한 이유 2

단상#9 이전의 나를 잘라내기 위해

by 우란

단상#9 <내가 퇴사한 이유 2>


시나리오를 처음 쓰면서 가장 빈번하게 사용한 단어는 '시스템'이었다.

시스템 단어를 다 지운 다음에야 공모전에 완성한 시나리오를 낼 수 있을 정도였다.

'시스템'만큼 신뢰성이 두둑한 언어는 없었으니까?

아니, 나는 '시스템'을 혐오했기에 자주 언급했다.


내 작품의 장르는 드라마와 스릴러가 섞여있고, 명백한 복수물이다.

그러나 적대자를 죽이진 않았다.


결국 '복수를 할 수 없어서' 퇴사를 결심했다는 진실이 드러난 순간이었다.

끝내 묻을 수 없는 사실인 동시에 나의 진심이기도 했지만, 현실은 가슴 아픈 통찰의 선택이었다.

사람이 '참 착하다는 말'을 귀에 딱지가 생길 정도로 들어서 그랬을까.

매번 '똘빡'이라고 들어서 그랬을까.

아니, 손가락을 치켜들고, 목소리를 높이고, 발뒤꿈치를 살짝 들고 그 앞에 서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퇴사했다. 쫓겨났고, 포기했고 도망쳤고... 드디어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사실 그가 만든 시스템에는 내가 굳이 필요 없었기에 무난히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탈출할 수 있었다.

서로에게 윈윈이었다.

적어도 겉보기에는.


나의 첫 시나리오는 퇴사를 마음먹은 순간부터 암암리에 쓰였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주인공이 그의 시스템에서 절망을 맛보게 한 일이었다.

그를 죽이지 않으면, 당장 내일을 살 수 없을 정도의 극한의 분노와 살기를 표출해야 했으니까.

원래 살인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건 살인 동기가 아닌가.


사람을 믿지 않는 그에게 시스템은 곧 '나'였다. 자기 자신.

내가 만들고 닦아 놓은 길이 곧 진리였으니, 아마 하느님만큼이나 자신의 존재를 위대하다고 믿었을 것이다.

인간의 따뜻함을 중시하던 그의 껍질 안에 숨은 오만함과 허세가 딱 그만큼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정말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원래 문제는 누군가 건드려야만 터지는 지독한 성질을 갖고 있지 않은가.

그가 만든 시스템에는 문제가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먼저 퇴사한 선생님은 이렇게 표현했다.

"지 밖에 모르는 병신들의 공간이며, 위대하신 그분은 죽을 일이 없으니 빨리 탈출해야만 한다."

덧붙여 이모는 "그 지방 변두리에서 참 열심히도 산다."라고 했다.

("그래 봤자, 딱 지 키만큼의 공간이면서 지랄은-"을 끝으로 대화를 접었다.)


그렇게 자긍심을 갖고 있던, 긍정에서 악취가 났는 데도, 그는 자신있게 말했다.

"우리처럼 편하게 일하는 곳은 없어."


나는 그곳에서 참 많은 선물을 주고 받았다.

받을 때마다, 주는 게 더 많았다는 걸 깨닫지 못했다.

이미 '시스템'에 푹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선물의 가치는 그가 주장하는 '교환의 법칙'에 의해 변질되었었다.

준 것만큼 받지 않으면 호구였는데, 매번 그가 아닌 내가 호구 역할을 맡았다.

나 말고도 참 많은 대기자가 있었기에 그는 단 한 번도 호구를 할 기회가 없었다.

그리고 모든 일을 수행하는 충신 한 명. 사실 뭐, 그거면 끝난 얘기였다.


시나리오에는 오만함과 허세가 지독한 향기를 내뿜고 다녔다.

다른 건 못해도 그 부분 하나만큼은 자신 있으니, 믿어도 된다.


적대자를 최선을 다해 죽이지 않으면 안 될 이유는 이것 말고도 참 많았다.


그러나 앞에서 고백했듯, 적대자는 끝내 죽지 못했다.

열린 결말로 피를 상징하는 씬을 넣었지만, 내가 내린 결말엔 주인공이 흘린 피만 첨벙거릴 뿐이다.

여전히 극복하지 못해서? 그의 망할 시스템에 벗어나지 못해서?


4개월이 걸렸다. 이전의 나를 잘라내기까지.


시나리오는 제일 먼저 나의 어둠을 직시했다.

부인할 필요도 없었지만, 감추기만 했던 과거는 더 이상 쓸모없었다.

반드시 시스템 속에서 자랐던 내 신체 일부를 모조리 도려내야 했다.

성장의 과정이자, 나 자신과의 약속이었고, 무엇보다 주인공이 선택한 결과였다.


그를 쉽게 하차시킬 수 없었다. 그건 현실 속 나도 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뭐- 그로 인해 시나리오를 한 편 완성했다는 점도 적대자를 살리는 데 한 몫했다.

물론 여전히 시스템은 혐오한다.

거짓으로 뭉친 그의 세계에서 빠져나온 이후로도 꾸준히 싫다.


시스템은 현실에서도 시나리오 속에서도 견고하다.

절대 악은 사라지지 않고, 매 순간 인간의 마음에 어둠의 씨앗을 뿌리고 다닌다는 판타지 영화의 설정이 맞다.

"어둠은 빛에서 오고 빛은 어둠에서 온다."

게임을 실시화한 영화에서 각인된 말이지만 사실 누구나 겪는 인생의 진리 아닌가.

애초에 무너질 거란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 들리겠지만,

그때의 나를 지금의 나에게서 떼어놓기 위해 미리 움직인 것이다.

퇴사란 결정으로.

내겐 엄청난 용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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