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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란 Oct 05. 2019

엄태구를 사랑해서
병구도 좋았습니다, <판소리 복서>

판소리와 복싱의 만남도 물론 독특했지만 -

<제20회 전주국제영화제 DAY 2>

* 본 리뷰에는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있습니다..


<판소리 복서> / <뎀프시롤(가제)> 
My punch-drunk boxer , 2018 제작  

한국 |  코미디 외 |  2019.10.09 개봉 |  12세이상관람가 |  114분 

감독: 정혁기 


엄태구를 사랑해서 병구도 좋았습니다, <판소리 복서>



<판소리 복서>의 이야기 구조는 간단하다. 복서 유망주였던 병구가 한순간의 실수로 인해 바닥으로 추락한 후, 다이어트 복싱을 하러 온 신입회원 민지를 통해 다시 복싱에 도전하는 스토리. 
단순한 구조를 이용한다고 해서 모든 영화가 재미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본 영화는 구조와는 별개로 사건 진행이 많이 익숙하고, 무게감을 둔 지점이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아 한 수 앞서 준비한 반전이 제 빛을 내지 못한다. '판소리'와 '복싱'을 '결합'해 관객에게 색다른 시각을 제공하고 있지만, 홍보용으로만 사용하고 있다는 안타까움도 갖게 한다. 분명히 영화의 시작과 끝을 엄태구의 판소리 복싱으로 채워 관객의 눈과 귀를 사로잡고 있다. 다만 그 점이 정말 <판소리 복서>가 보여주고자 했던 것일까 하는 뽀료퉁한 생각이 자꾸만 든다. 다들 알다시피, 눈과 귀를 자극하는 수많은 작품도 '강력한 메시지'와 '인상 깊은 한 장면'을 갖고 있지 않으면, 금세 지루한 영화로 평가받질 않는가.


그럼에도 <판소리 복서>의 메시지를 '의지만 있다면 뭐든 도전하고 결실을 맺을 수 있다.'로, 명장면을 '병구의 판소리 복싱'으로 결론 내기로 했다.(사실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아주 보통의 시각이니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을 것이다.) 소소한 행복과 웃음을 주는 따뜻한 영화 한 편으로 <판소리 복서>를 마음속에 간직하기로 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기에 많은 관객이 감동적인 작품이라고 입소문을 냈으면(?). 

출처: 영화 <판소리 복서> 스틸컷

그리 무리한 일은 절대 아니지만, <판소리 복서>를 기분 좋은 영화로 끝맺음하게 한 것은 딱 한 명 때문이다. 
'배우 엄태구'.

필자가 매진 행렬을 기록하는 전주국제영화제의 유명 상영작들을 제쳐두고 <판소리 복서>(당시에는 <뎀프시롤(가제)>였다)를 가장 먼저 예매한 이유는 순전히 '엄태구 배우' 때문이었다. 사람들마다 '믿고 보는 배우'가
있겠지만, 그는 나에게 '그냥' 믿고 보는 배우가 아니었다. 팬심은 기본이고, 그가 나온 작품은 모두 봐야 한다는 책임감까지 장착했으니, 더는 구구절절 말하지 않겠다. 

엄태구 배우에 제대로 빠진 작품은 조용익 감독의 <시시콜콜한 이야기>(2017)였다.(시나리오 공모전에서 탈락한 문자를 받은 그의 표정이 여전히 기억 속에 남아있다.) 찌질함과 소심함을 넘나들면서도 순수함을 장착한 그의 연기는 돋보일 수밖에 없었다. 


좀 더 속마음을 털어놓자면, 그의 매력은 하나로 정의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엄태구 배우가 연기하는 인물은 모두 생동감이 넘쳤고, 단번에 눈에 쏙 들어와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전 작품에서 봤던 얼굴이 단 한 번도 그다음 작품에 겹치지 않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능력은 배우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무기가 아닌가. 그는 <은밀하게 위대하게>(2013), <가려진 시간>(2015), <밀정>(2016), <택시운전사>(2017), <안시성>(2017) 등에 출연해 대중들의 눈도장을 받은 배우다. 그것도 모두 다 다른 얼굴로 관객의 마음을 흔들었다는 점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주연으로 활약한 <잉투기>(2013)와 <시시콜콜한 이야기>(2017), <어른도감>(2017)는 필자에게 보다 더 특별하게 기억에 남는다. 
아, 한 가지 더 엄태구 배우의 팬이 된 이유를 말하자면 이렇다. 그가 찍은 작품 전부를 다 보지 못했지만, 적어도 내가 본 모든 영화는 다 만족스러웠다는 것. (영화를 볼 때마다 매번 '처음 보는 배우'라 착각하게 만드는 마법이 계속되는 한 나의 무조건적인 팬심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본론으로 돌아와 또다시 말하자면, <판소리 복서>는 '병구를 연기한 엄태구'로 인해 필자에게 참 재미있고 소소한 영화로 기억될 것이다. 민지를 연기한 혜리에 대해서는 그녀가 '맡은 역할에 충실했다'는 것으로 말을 줄이겠다. 부정적 측면을 빼고는 더 이상 할 얘기가 없지만, 그녀가 꾸준히 노력하는 배우라 믿고 있으니까.  

출처: 영화 <판소리 복서> 스틸컷

<판소리 복서>는 해변에서 판소리에 맞춰서 섀도우 복싱을 하는 병구로 시작한다. 멀리서 장구를 치며 추임새를 넣는 지연과 앞에서 눈을 부릅뜨고 몸을 좌우로 흔들거리며 펀치를 날리는 병구, 그리고 수평선 위로 떠오르는 해. 이 한 장면을 통해 우린 과거의 병구가 얼마나 찬란한 삶을 살았는지를 알 수 있다. 뒤이어 곧바로 지연의 우렁찬 '어이!' 소리에 꿈에서 깬 병구의 모습은 헛웃음과 탄식을 터져 나오게 한다.  

순식간에 거품으로 사라져 버린 과거의 기억. 막 꿈에서 깨어난 그에게 '복싱 유망주'란 타이틀은 이제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다. 그의 빛났던 과거는 체육관에 걸린 현수막에서만 존재했고, 현실엔 먼지 낀 그림자만 가득하다. 동네 바보이자 현직 체육관 코치로 열일하고 있지만 웃플 뿐이다. 매일 같이 체육관 홍보 전단지를 붙이고, 선수 데뷔를 준비 중인 까칠한 교환의 비아냥거리는 말을 들어가며 청소에 매진한다. 카리스마 넘치던 옛 모습은 덥수룩한 그의 머리만큼이나 답답한 한숨으로 남아 꿈자리까지 괴롭힌다. 

출처: 영화 <판소리 복서> 스틸컷

민지를 만나기 전까지 병구는 계속해서 과거 자신의 옆에서 장구를 치던 지연을 꿈속에서 만났다. 기억을 잃어가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 그저 '이상한 꿈'이라 치부했던 그는 이제 일상생활에서도 종종 눈 앞에 서있는 지연을 발견한다. 귀신을 보는 것 같기도 해 놀라지만, 그저 침묵한 채 빤히 쳐다보기만 하는 지연을 무시할 수가 없다. 

지연은 병구의 유일한 벗이었다. 병구가 꾸는 꿈속에서 지연은 한복을 입고 우렁찬 가락을 뽑아내는데, 그 모습은 살랑살랑 몸을 움직이는 자신과 완벽한 한 쌍을 이루고 있었다. 그는 복싱을 더 이상할 수 없는 것도, 지연과 현실에서 마주하지 못하는 것도 모두 자신의 실수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착한 사람인 것 같다는 민지의 말에 "아니요, 저 나쁜 사람이에요."라며 부인한다.  

  

병구의 비밀은 두 가지로 <판소리 복서>가 숨겨놓은 반전의 키로 사용된다. '제명된 복싱 선수'와 '펀치드렁크를 앓고 있다'는 것. 주인공의 신체와 정신은 모두 죽어가고 있었다.   
그는 과거 시합 전에 무릎 통증으로 약을 복용한 행위가 도핑으로 간주되어 복싱 선수에서 제명되었다. 이후 박코치님을 따라 시골로 내려와 체육관에서 살기 시작한다. 박코치는 꿈이 날아가버린 병구를 데리고 박관장이 되어 쓰러져 가는 체육관을 자신의 현실로 받아들이고 사는 인물이다. 체육관이 망하면 교회 목사님으로 직업을 바꿀 생각까지 하고 있다. 뜬금없이 복싱을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병구의 말에 볼멘소리를 하며 차일피일 미루는 것도 일상 루틴이 된 그다. 

그러나 새로운 회원 민지의 등장으로 인해 병구는 박관장의 말을 과감히 어기기 시작한다. 치매처럼 기억상실증을 불러일으키는 펀치드렁크를 앓고 있으면서도 다시 링 위에 올라 복싱선수로 살고 싶은 꿈은 병구의 식어버린 마음에 불을 지핀다. 

"한 번 사는 인생 하고 싶은 거 해요."
출처: 영화 <판소리 복서> 스틸컷

병구는 든든한 지원군 민지와 함께 복싱을 정식으로 다시 시작한다. 다시 땀을 흘리기까지의 과정에는 주인공을 둘러싼 다양한 인물들이 그에게 영향을 주고 또 받는다. <판소리 복서>의 집중도는 바로 여기서 결판이 난다. 삼류가 되지 않기 위해 병구를 외면한 교환부터, 착한 사람이 이상형인 민지의 짝사랑 성공, 친구 지연의 죽음을 잊어버렸던 병구의 자책, 병구의 순수함을 대변했던 강아지 포먼의 죽음, 사랑하는 제자의 병을 알게 된 박관장의 결심까지 감독은 주인공의 새로운 도전을 위해, 더 세밀하고 선명하게 이야기를 엮었다. 
그 덕에 병구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판소리 복싱'을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     


곳곳에 신파적인 요소가 다분하게 느껴지지만, 감정을 끓어오르게 하는 병구의 말 한마디와 하나의 땀방울은 영화를 더 드라마틱하게 만든다. 각자 다른 마음을 가졌던 인물들을 하나의 마음으로 모을 수 있었던 것도 마찬가지다.

"시대가 끝났다고 해서 우리가 끝난 건 아니잖아요."
출처: 영화 <판소리 복서> 스틸컷

<판소리 복서>가 아쉬움을 남긴 부분도 공교롭게도 두 가지다. 
먼저 장구 치는 지연이 등장할 때마다 상기시켜주는 대사 한 줄이다. 

"넌 세계 최고 판소리 복서가 될 거야. 가장 한국적인 게 가장 세계적인 거니까."

영화가 말하고 싶었던 가장 한국적인 것은 '판소리'다. 그렇다면, 판소리가 가장 세계적인 것이란 말인데 그게 병구의 복싱 도전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제일 먼저 든 의문이었다. 판소리가 아니라 꿈이나 목적, 신념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했다. 하지만 매번 '세계적인'에 턱 막혔다. 도대체 세계적인 게 뭘까? 세계적인 존재가 되면 뭐가 달라지는 가?

다른 한 가지는 환상인지 현실인지 모를, 마치 <부산행>의 마지막 장면(공유가 기차에서 떨어질 때 등장하는 뽀얀 안개와 딸을 안고 있는 자신의 모습)처럼 결말을 그린 점이다.

고대하던 링에 서서 병구는 상대편 교환에게 얻어터지면서도 끝까지 가드를 내리지 않는다. 그의 몸 상태를 우려하는 민지와 박관장에게 괜찮다며 그들을 안심시킨다. 고장 난 체육관 TV처럼 버려질 수 없는 그였다. 고장나버린 자신의 인생은 스스로 고쳐야만 했고, 자기로 인해 덩달아 인생의 암흑기를 보내야만 했던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백기를 들 수 없었다. 

"민지 씨 시합은 아무 상관없어요. 모든 것들은 사라지고, 잊혀요. 저 역시 잊힐 거예요. 하지만 저는 다른 사람들에게 링 위에서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요."

병구의 조력자 역할을 자처했던 민지는 그의 진심에 링 옆에서 기꺼이 장구를 치기 시작한다. 지연의 몫을 대신해 판소리를 선물하고 그는 원 없이 몸을 흔들거리며 판소리 복싱을 선보인다. 


이후 교환에게 펀치를 맞은 후 병구는 또다시 '길고 이상한 꿈'을 꾸면서 일어난다. 

일어나 민지에게 그 꿈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체육관의 전경을 바라보는데, 휑했던 그곳엔 사람들이 득실거린다. 저마다 병구를 보며 코치님! 하는데 그 뒤로 그의 화려한 데뷔를 축하하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세계 최초 판소리 복서!"

해변 모래사장, 포먼의 새끼 강아지들이 병구의 품에 안겨 있다. 저 멀리 민지가 보인다. 

그들의 로맨스도 성공적으로 이어지면서 <판소리 복서>는 끝이 난다.

출처: 영화 <판소리 복서> 스틸컷

<판소리 복서>는 세계적인 것을 끝내 풀어내지 못했다. 민지가 지연의 역할을 대신하기 위한 인물이었뿐, 그 이상의 존재감은 발휘하지 못했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 모두가 만족할만한 해피엔딩을 그리고 싶어 억지로 병구의 꿈을 이용한 점까지 포함해서. 

하지만 감동 코드는 확실히 있다. 병구의 펀치드렁크가 빚어낸 아픔과 슬픔이 도전과 의지로 변하게 되는 과정도 다양한 인물들의 관계성으로 자연스러웠다. 순수함과 독기를 순식간에 왔다 갔다 하는 병구의 눈빛도 한몫했고, 예상치 못한 장면에서 웃음을 유발하게 하는 점도 있어 좋았다. 


각종 미사여구와 긴 서두로 시작한 리뷰를 단 한 줄로 요약하면 이렇다.

엄태구를 사랑해서 병구도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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