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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란 Mar 31. 2020

업힌 / 안희연 시인

오늘의 당신을 위로할 시 한 편.

업힌 


                    안희연




산책 가기 싫어서 죽은 척하는 강아지를 봤어 


애벌레처럼 둥글게 몸을 말고

나는 돌이다, 나는 돌이다 중얼거리는 하루


이대로 입이 지워져버렸으면, 싶다가도

무당벌레의 무늬는 탐이 나서

공중을 떠도는 먼지들의 저공비행을

유심히 바라보게 되는 하루


생각으로 짓는 죄가 사람을 어디까지 망가뜨릴 수 있을까

이해받고 용서받기 위해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최대치란 무엇일까


화면 속 강아지는 여전히 죽은 척을 하고 있다

꼬리를 툭 건드려도 미동이 없다


미동, 그러니까 미동

불을 켜지 않은 식탁에서 밥을 물에 말아 먹는 일

이 나뭇잎에서 저 나뭇잎으로 옮겨가는 애벌레처럼

그저 하루를 갉아먹는 것이 최선인


살아 있음,

나는 최선을 다해 산 척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실패하지 않은 내가 남아 있다고 믿는 것 같다


애벌레는 무사히 무당벌레가 될 수 있을까

무당벌레는 자신의 무늬를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을까


예쁜 것들을 곁에 두면 예뻐질 줄 알고

책장 위에 차곡차곡 모아온 것들


나무를 깎아 만든 부엉이, 퀼트로 된 새 인형, 엽서 속 검은 고양이, 한 쌍의 천사 조각상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보는 순간이 있다

나는 자주 그게 끔찍해 보인다



                                                   


계간 《문학동네》100호

2019 가을





나는 그래

빈둥거린다고 생각이 없는 것도, 삶을 향한 의지가 없는 것도 아니다. 
뭐가 옳고 그른지를 판단할 수 없는 건 감정적 동물인 인간이 지닌 가장 큰 의문이니까. 
평생 정답을 찾지 못하는 까닭은, 현재 내가 말하는 의문과 일맥상통한다.
실수와 실패를 반복하면서 얻는 성취와 성장과는 다른 선상에 위치해 있는 그것.
죽을 때까지 홀로 살 수 없는 이유와도 직접적으로 맞닿지 않는 그것.

'무기력한 외로움'. 
 
근본적인 외로움은 타인에게서 요인이 오기 전부터, 내면 깊숙이 잠재되어있는 '나'의 흔들리는 정체성에서 시작된다. 남과 손을 맞잡고 있지 않은 것보다도 '내가 누구인가?'란 물음이 훨씬 더 인간을 괴롭게 한다. 저 멀리서 단번에 날아와 가슴에 꼳히는 화살이 삶의 가장 극적인 순간마다 찾아오는 것처럼. 우리가 세운 방어막 역시 살랑이는 바람에 쉽게 찢어질 운명에 처해있다. 
 
그건 '피할 수 있다'는 관대한 선택지도 아니라서, 이를 '이겨낸다'는 표현보다는 '버티고 또 버텨야 한다'라고 말해야 맞다. 결국 미래의 나를 결정하기 위해 현재의 나는 끊임없이 고통에 몸을 담고 있어야 하고, 나아가 그 고통에서 희미한 희망과 절실한 의지를 발견해야만 한다. 

무기력한 외로움을 즐기는 이들 역시 처음부터 따뜻한 햇살이라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버티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나아갔겠지. 

그렇게 살아있음을, 숨을 쉬고 있음을, 나에게 나를 인정하고 있음을 스스로 확신시켜줘야 한다.
자신감과 자존감은 타인이 주는 트로피가 아니니까.
 
시인의 말처럼 방을 차지하고 있는 당신의 모든 발자취가 종이 한 장 차이로 인생 쓰레기들이라 여길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끔찍해 보이는 것들에게서 추억을 느끼고, 그때의 향수를 그리워하면서 안도의 한숨과 안정감을 느끼면서 내면의 균형을 맞춰가는 것만큼 중요한 건 없으리라. 

우린 과거의 나를 주저 없이 업고, 미래의 나에게 힘차게 업히는 연습이 필요하다. 

지금도 그것은 당신을 맹렬하게 쳐다보고 있다. 
자신을 바라봐주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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