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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란 Apr 11. 2020

비눗방울 유감 / 최지온 시인

우린 무늬를 갈취당하고 있다.

비눗방울 유감  

                                  

                                    최지온




백색광을 들이대면 백 가지의 색깔이 떠오를까요

무늬 없는 사람들은 현기증이 납니다


빨대를 지나며

투명하게 부푼 사람들,

잠에서 깨어나면 어김없이 꿈을 꿉니다


누구나 발을 내딛는 곳

나는 계단과 꽤 친한 편입니다


한 발을 올려놓기 무섭게 소리 없이 터집니다

의문을 달 시간도 없이

올라가려는 사람들, 그곳은 항상 소란스러워요

바닥에 오래 머물면 내 발은 어두워지죠

박자에 맞춰 춤을 춥니다


아래로만 떨어집니다

더 위로 날아가 떨어집니다

나는 약간 독하고 억세다고 믿었는데

자주 쓰러집니다

거짓말처럼 떨어져 얼룩이 됩니다

얼룩은 지루한 시간을 잘 견딥니다 나는 숫자를 잊어요

잘 견딘다는 말은 거짓말이에요 꿈속에서 시간을 주워 담아요


종일 부푸는 것만 배웠어요


떨어지는 것에 대해 오래오래 생각합니다

고장 난 약속들로 내 몸은 믿음이 약해져요 멀미가 납니다


쓰러지는 것은 순합니다 기도를 하면 불행도 제법 부드러워집니다


무늬 없는 사람들이 즐비합니다

우리는 서로의 얼룩을 이해합니다





계간 《시와 반시》 
2020년 봄호




나는 그래

내 곁에는 정도를 걷는 사람이 없다. 
올바른 규칙을 세워 그 길 위에서 단 한 번의 흔들림 없이, 일생을 타인들의 존경을 받으며 사는 지인이 없단 얘기다. 분명 어딘가에 있을 텐데, 내 주변에는 없다는 점. 현실이다.

자기의 가치관을 세상을 살아가는데 쓰지 않고, 타인을 뜯어고치려는 데 온 힘을 다하면서 존경까지 바라는 인간은 잘 안다. 나의 현실에는 그런 사람이 참 많았다.

그들은 모두 자신을 화려한 무늬를 가진 사람이라 믿는다. 그래서 자기 색깔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사람들을 휘둘러 자신의 색으로 바꾸고 싶어 한다. 어디서 그런 하등한 욕구가 나오는지 모르겠으나, 하나같이 그들에겐 절대 신념이 자리하고 있다. 
오롯이 나만을 위한 욕심. 그 욕심을 꾸준히 생성하고 푸는 행위가 남의 속내를 갈기갈기 찢고 있다는 것은 결코 모른다.   

안타깝게도 거미줄에 걸린 벌레들이 스스로 탈출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만큼 그들은 지나치게 예민하고 치밀하다. 말 한마디를 그냥 넘어가지 않고, 온통 자신의 행동들을 정당화하기 바쁘다.

참고로 "어떻게 이걸 모르지?"가 그에게서 내가 들은 가장 무식한 말이었다. 
 
어쩌면 시인이 말한 '무늬 없는 사람들'은 '무늬를 감춘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굳이 자신의 가치관을 겉으로 치장하지 않는 사람들, 그렇게 휘황찬란하게 화려한 천을 두르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들. 그래서 서로의 얼룩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나 편견이 없는 사람들. 서로 다른 무늬가 모여서 소란한 이야기를 만들고 사건을 폭발시키는 것들도 전부 일상의 흐름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 보이지 않아도 분명히 있음을 스스로 증명하며 사는 사람들. 

'무늬 없는 사람들이 즐비합니다'란 시구절에 마음이 아려왔다.
그들이 전부 현기증 나는 사람들로 치부돼버리는 순간을 너무나 잘 알기에. 

같이 일했던 선생님에게 여전히 그가 "어떻게 이걸 모르지?"라고 떠들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불행을 불행이라 말하지 못했던 그때의 내가 떠올랐다. 
무늬를 갈취당하고 있는 줄도 몰랐던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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