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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란 Oct 26. 2020

깊이 / 이인주 시인

깊이


  이인주




당신은 알지만 나는 모르는 길이 있다


바늘구멍에서 시작된

심방을 엿보는 각방


구멍은 소문이라는 배율을 낳고 

구멍은 자해라는 무덤을 낳고


주둥이 터진 말이 밑 빠진 독과 등가일 때

고독은 늙어간다 오독으로 불어난 허기가

굴참나무 가지 끝 하늘마당에 걸리면

온갖 별들이 공중돌기를 한다 

질시와 편견 사이 나무를 흔든다


빠지면 죽는 절구통인 줄 모르고

알몸으로 뛰어내리는

도토리


그 무구를 흠모라 부르는가

당신도 견디고 나도 견디는


서로 놀란 등을 맞대고

깎고 또 깎아 만드는 자수정

가장 깊은 밤의 광채를, 


나는 알지만 당신은 모르는 길이 있다




간시전문지 《애지》 

2020년 가을호



나는 그래

평생 구멍을 파야만 하는 삶을 생각해봤다.
어떤 구멍인지, 무엇을 위한 구멍인지 생각하는 동안 '아 정말 끝이 없겠구나.'란 지혜를 얻기도 했는데, 실상은 깊은 우울함을 느꼈다. 무력감이 동반하는 순간도 있었다. 
내 삶이었고, 나와 다른 이의 삶이었다.
그래서 '견딘다'는 말 앞에 붙을 수많은 말이 떠올랐다.
책임 있게 내뱉어야 한다는 책임감까지 견뎌야 한다는 점도 어렵지 않게 깨달았다.

나는 주로 '나'를 탓하는 구멍을 만든다. 심지어 내가 자각하지도 못한 채 파놓은 구멍도 있다.
남 탓보단 내 탓을 더 중요시하는 인간상도 아닌데 매번 어떤 일이 일어날 때마다 
자연스럽게 곡괭이로 내 발등과 내 손등과 내 가슴 한가운데를 겨냥한다.
그 짓이 세상에서 제일 쉬운 사람이라 그렇다. 

질투와 후회, 슬픔과 우울, 소심과 소란, 자책과 실망의 구멍들이 제각각 자신의 구역을 철저하게 지키고 있어, 내 삶에서 무사 도주는 어림도 없다. 해가 뜨면 빛에 발광하는 아름다운 호수를 보는 것 같은데, 달이 뜨면 그렇게 눈이 부실 수가 없다. 눈을 뜨고 있기 힘들 정도로 내 몸에서 빛을 뿜어낸다.
그래서 밤엔 눈을 감아야 한다. 양을 수십 마리, 수백 마리를 세더라고 반드시 두 눈은 감아야 한다. 

가끔은 갖가지 이유로 늘어나는 구멍에 이름을 붙이고 싶기도 하다.
그럼 좀 친근해지지 않을까 해서. 어차피 내 것을 당당하게 남에게 보여줘도 소용없으니까.
그럴 바엔 가시를 품어도, 피를 좀 흘려도 내가 마땅히 껴안고 가야 한단 생각.
 
그 생각이 유일한 대답이 아닐까.
'견딘다' 앞에 붙을 수 있는 최선의 말이 아닐까. 
이건 타인의 배려로, 이해로, 아니 비난으로도 결코 사라지는 문제가 아니다.

그리하여, 마지막 구절은 많이 축약됐다.
.
.
.
'나는 알지 못해도 속속히 다 보이지만, 당신은 알다 못해 궁금해하지도 않는 모르는 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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