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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란 Oct 05. 2020

안전한 궁지 / 윤지영 시인

나는 아니었다. 그래서 다음엔 그랬으면 좋겠다.

안전한 궁지  


                    윤지영




먼지 같은 것들, 머리카락 같은 것들은 왜 모여요?

국경을 향해 밀려드는 어린 난민들처럼

막다른 곳에 모여

왜 뭉쳐요?


투명하고 가벼워 아무것도 아닌 것들


맨발의 아이들이 깨진 가로등 조각을 밟으며 막다른 골목으로 모여요

반 평짜리 경비실 문턱에는 꽃잎들이 모여요

쓸어도 쓸어도


각기 다른 위도에서

저마다의 속도로 추락하고 구르고 흩어지다 모여요

왜 모여요?

모여서 어떤 일이 있어도 헤어지지 않을 표정으로 손을 잡고

왜 뭉쳐요?


추운 나라에서 온 계절처럼

가벼워 가벼워

언제든 흩어질 거면서 무엇을 기다려요?

왜 모두 같은 표정으로




계간 《문학과 사람》
2020년 가을호






나는 그래

나에 대한 소문은 적었지만, 알찼다. 
사실 어떻게 알찼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기분 나쁜 일들이 겹쳐 엄청난 악재가 된다는 말을 이해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들이 모여들어 하나의 군중을 만들어 나를 서서히 옥죄고 있음을 어렴풋이 눈치챘을 뿐이었다. 좋은 징조일까?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이제라도 알았으니 고치거나 무시하면 되겠다 했다.
그러나 점점 군중의 단위는 몇 배로 늘어갔다. 느껴졌다. 
가만히 있는 것도 무언가를 행동하는 것도 사실상 무의미한 발길질임을.
난 쉽고 빠르게 하찮아졌다.

난 나의 소문을 명확하게 알 수 없었고, 그렇다고 또 아예 모르지 않았으니, 답답함은 군중이 늘어나는 것보다 몇 십배 더 심해졌다. 한 번 빠져버린 구덩이에서 빛이 사라지는 걸 보고만 있는 것처럼, 영영 빠져나오지 못할 거란 확신을 스스로에게 정확히 알려주고 있었다.
앨리스가 토끼를 따라 나무 굴로 들어갔을 때처럼 두려움과 설렘이 공존했다면,
이렇게 애매한 표정으로 처연한 태도를 갖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나의 안전한 궁지를 쉽게 점령할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을까.
아니, 내게 안전한 궁지가 사실 그렇지 않은, 안전하지 않은 궁지였을까.

소문의 발생지는 분명 나였을 것이다. 
나란 존재 자체에서 시작된 수많은 단어들과 감정들이 뒤섞여 확인되지 않은 화살촉으로 만들어졌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고민하던 시기를 지나, 어떻게 그것들을 상대할 것인지를 생각하는 시기를 맞이한 지금. 난 위태롭지만,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모래성 위에 있진 않다. 내 마지막 투쟁이다.

끊없는 투쟁이 알맞을 것 같다.
그래서 '투명하고 가벼워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게서 연민과 동질감을 느끼지 않는다.
여전히. 계속될 투쟁 앞에선 더욱 가질 수 없는 것들이니까.

사실. 이것도 저것도 확실히 결론 낼 수 없기에 그것들의 손을 잡아도 쉽게 미소를 지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분명 모두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내가 보는 그것들의 표정은 달랐으니까.
동그라미 두 개와 삼각형 하나, 이것도 저것도 아닌 이상한 형태의 도형 하나로 이루어졌을 뿐이었다.
기괴했으나 익숙했다. 그러니 계속 손잡고, 서로를 껴안고 있을 이유가 없는 거다. 

쉽게 정을 주고, 기쁨을 나눌 수 없는 건 그 이상한 형태의 도형 하나 때문이다. 
도형이라 부를 수 없는 것이 내뱉는 말들을 경험해본 자는 알겠지.
또, 내가 한치 고민도 없이 내린 유일한 결론이자, 진실이다.

하여,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니었다. 
곱씹을수록 동의할 수 없었다.


그러나 다음엔 그랬으면 좋겠다. 온전히 안전한 궁지를 느꼈으면 한다.

사람을 믿었으면 한다. 아니, 사람을 믿는 나 자신을 믿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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