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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란 Mar 17. 2021

청귤 / 안희연 시인

푸르뎅뎅함에 나는 구해달란 말을 했다


청귤 / 안희연




오늘 당신은

청귤의 모습으로 오는군요


설익은 것처럼 보이겠지만

제법 달다고

그 푸르뎅뎅함이 바로 나라고


청귤은 내게 일렁이는 무늬로 말하네요

당신은 나를 제단 위에 올릴 수도 있고

구둣발로 짓이길 수도 있지만

나는 어디서든 떳떳하고 공평하다고


나에게서 지옥을 본다면 그건 당신의 지옥이라고

물이면 물, 불이면 불이라는 표정을 짓는군요

흰 천으로 잠시 덮어두었습니다

똑바로 볼 자신이 없었습니다


새에게 다가가려는 걸음이 새를 쫓는 걸음이 되기도 하기에


밤이 되기를 기다렸습니다

창밖을 보려면 창문에 비친 나부터 보아야 하는 시간입니다


놓여 있는 모양 그대로

바라보기

조각내지 않기


보여줘도 모르는 사람이 되지 않게


흰 천을 걷자 청귤이 있습니다

오늘 당신은 내게 사랑의 모습으로 오는군요


청귤을 보는데 심장에 화살을 꽂고 걸어오는 맹수가 보여요

어린 나를 물고 한발 한발 오고 있어요

구해달라는 말인 것 같아요



월간《현대시》 

2021년 2월호





나는 그래

푸르뎅뎅함에 눈이 갔다.
청귤이 나에게 다가왔을 때 할 수 있는 말은 "저리 가".
어제 거울 앞에 섰을 때 가장 솔직하게 말했던 첫마디와 같았다.
어디서나 볼 수 있지만, 눈길을 주지 않으면 모르는 나였다.
거짓말은 물론이고 흔한 인사치레와 같은 말들만 쏟아내던 나였다.

할 수 있는 말과 하고 싶지 않은 말들을 중에서 
기가 막히게 하려고 했던 말들만 빼고 모두 내뱉었던 전적이 있어서
밤이 되면, 창문을 보지 않아도 내가 보였던 시절이었다.

사실, 모두 나에게 한 말들이다.
믿지 못해서, 시간이 너무 빨리 가서, 가는 시간만큼 손에 쥔 것이 없어서..
사랑의 모습으로 나에게 오던 것들이 전부 기괴한 질투와 허망함으로 왔다.
그래서 청귤의 푸르뎅뎅함에 마음이 갔다.

새에게 다가가는 걸음이 새를 쫓는 걸음이란 사실을 알지 못해,
새와 나는 종종 길을 함께 잃었다.

청귤이 내게도 왔다.
어제도 왔기에, 오늘도 올 거란 사실을 알고,
내일도 오늘처럼 태연하게 다가올 것이다. 

무섭기도 하고 싫기도 한데, 떼어놓고 볼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멀리할 수 없는 이유를 딱 한 가지밖에 말할 수 없다.
어떻게 나에게서 내가 도망갈 수 있을까.

나는 나에게 맹수이면서 아니다.
"저리 가!"라고 소리칠 수 있지만, 매일 밤 나를 맞이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그리하여 결국 도움을 요청하고 만다.
적어도 내일은 다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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