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광규 시집,『담장을 허물다』2013
정원이 아름다운 집을 구하러 돌아다니다가
그냥 살던 집 벽을 헐고 창을 내어
풍경을 빌려서 살기로 했다
오래된 시멘트 벽이었다
쇠망치로 벽을 치자 손목과 팔이 저려왔다
한번 더 힘껏 치자 어깨와 가슴까지 저려왔다
쇠망치를 튕겨내는 벽
반항하는 벽 대신에 서까래와 대들보만 울었다
"벽은 안애서 밖으로 치는 것이여!"
지나가던 노인이 혀를 끌끌 찼다
그런가?
상처 난 벽을 잠깐 쳐다보다가 돌아보는 사이
노인은 자취가 없다
헛것을 본 것인가
동네에서 한번도 본 적 없는 노인이라는 생각을 하며
방 안에 들어가 밖으로 벽을 치자
망치 두세방에 벽이 뻥 뚫렸다
하늘이 방 안으로 무너지고 햇살이 쏟아졌다
터진 벽에 창틀을 끼우고 유리를 붙이자
창문으로 감나무와 버즘나무와 잣나무 숲이 선착순으로 들어오고
잣나무숲 뒤로 마을과 멀리 바위를 등에 업은 산맥이 들어왔다
산 중턱에 요란한 절과 반짝이는 교회 첨탑이 옥에 티지만
가끔 빗줄기와 눈발이 발을 쳐서 가려주었다
이 땅에 경치 좋고 인심 좋은 명당이 흔하겠는가
이게 인생 아니겠나
마음이 명당이면 되는 것 아니겠나
창을 낸 후 방 안은 매일매일이 유리 스크린 영화관이다
오늘은 직박구리 두마리가
가지에 매달린 언 감을 쪼아 먹는 모습이 다정하다
러브씬도 은근히 기대해본다
(주)창비
창비시선 365
©공광규 시집,『담장을 허물다』2013
78-80쪽
나는 그래
요 근래의 일이다.
모든 문제는 마음이 만들어낸 난제라는 걸 알게 됐다.
함께 놀던 친구도, 같이 사는 식구도,
함께는 물론 같이 사는 나 자신도
결국 다 나의 마음이 좌지우지한다는 걸 말이다.
힘듦이 다 그런 거지, 누구는 안 그런 가, 누구든 다 그렇지-
하며 가짜 풍경을 보며 쓴 미소를 짓던 일.
가짜란 걸 알고 나니,
왜 그렇게 내가 보던 것들이 흔했는지 알 것 같았다.
쓴 미소를 짓기도 전에 이미 쓱 올라가 있는 입꼬리는 또 어떻고.
...
그래, '풍경을 빌리'는 일을 해야겠지.
다른 건 죄다 모른 척해도, 이 일만은 필히- 해내야만 해.
알을 깨고 머리를 들이밀든 팔을 뻗든,
어둠 속에서 쌍라이트를 켜든,
만능열쇠로 모든 문을 열어젖히든,
어쨌든.
서두를 필요도, 조급해야 할 이유도 없지만,
결국 '자취가 없'는 노인의 목소리를 듣고
'방 안에 들어가 밖으로 벽을' 쳐서
기어코 진짜 인생을 직접 보고 느껴야 하는 거지.
예측 불가능한 날 것의 미소를 원 없이 남발하면서.
기필코 달라질 나를 보고, 이미 달라진 나도 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