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젊은 화가와 귀족 여인 > # 2
보티첼리는 메디치와 같은 피렌체의 주요 가문의 후원을 받았으며 거의 평생을 메디치 가문과 그 지인들을 위해 작품 활동을 했다. 그의 대표작이기도 한 <프리마베라(Primavera)>는 1482년경 로렌초 디 피에르 프란세스코 데 메디치의 카스텔로 별장을 치장하기 위해 그린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탈리아어로 프리마베라(Primavera)는 봄(spring)을 뜻하기에 이 작품은 '르네상스의 봄(Spring of the Renaissance)'이 도래했음을 알리는 시각적 찬미로 여겨지고 있다.
한편 화가가 당시 피렌체의 지배 가문인 메디치가로부터 의뢰받은 첫 작품이기에 그들의 주문 배경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다. '피렌체의 봄날 같은 번영'을 위해 메디치 가문이 새로운 봄바람을 일으키리라는 기대와 메시지가 담겨있는 다소 정치적인 작품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등장인물이 몇 명씩 나뉘어 그룹으로 구성되어있듯, 보티첼리는 여러 그리스 신화들을 가져다가 화가의 상상으로 연결해 작품을 완성했다. 스토리 전개는 우측의 요정 클로리스(Chloris)의 납치로 시작되어, 좌측 전령의 신 헤르메스(Hermes)로 끝난다. 이 같은 역동적인 스토리 전개에 비해, 화면의 시각적 구성은 W자 곡선을 그리며 부드럽게 묘사되었다.
봄 향기가 물씬 풍기는 <프리마베라>의 정원에는 풍부한 이야기만큼이나 여신들이 여럿 등장한다. 시모네타의 죽음을 슬퍼하며 그리워하던 보티첼리가 그녀 사후 그린 첫 작품이기도 한 <프리마베라>. 시모네타가 환생한 듯, 이 작품 곳곳에서 부활한 그녀를 만날 수 있다.
나폴리 고고학 박물관의 프레스코화 <폼페이 삼미신(The Three Graces, from Pompeii)>을 보자. 그들이 머틀 꽃으로 꾸민 화환을 쓰고 알몸으로 춤을 추고 있기에 '머틀 꽃이 만발한 삼미신(Three Graces with myrtle blossoms)'으로도 불린다. 고대 그리스 미술에서부터 등장했던 삼미신은 우미(優美)를 세명의 여신으로 의인화한 존재다.
보티첼리의 <삼미신(三美神, The Three Graces)>에서는 세 여신 모두 투명한 흰색 베일을 입은 채, 서로 손을 잡고 춤을 추고 있다. 삼미신은 그들 자신이 주인공이라기보다는 아폴론이나 비너스(아프로디테)와 같은 주요 신들을 보좌하며,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수행 단원들이다. 보티첼리의 작품에 등장한 삼미신들도 비너스 앞에서 무리 춤 동작을 취하고 있다.
보티첼리 이후 장 밥티스트 레뇨 남작(Jean Baptiste Regnault) 등 많은 예술가들이 삼미신의 군무를 다양한 각도에서 표현하면서 아름다운 작품을 남겼다. 보티첼리의 세명의 여신을 각각 관찰하면 헤어스타일과 장식구뿐만 아니라, 외모도 조금씩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삼미신들의 얼굴 도상은 한 여성을 각각 다른 방향에서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세명의 여신에게서 한 사람의 이미지가 겹쳐 서려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화가가 자신이 늘 그리워했던 시모네타를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주(變奏, Variation)해 그렸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들 중 가슴에 브로치(Brooch)를 하고 있는 가장 어려 보이는 좌측 여신은 보티첼리의 <비너스와 마르스(Venus and Mars)>에 등장하는 비너스와 흡사한 얼굴을 하고 있다.
시모네타는 당시 피렌체의 지배자인 메디치 가문과 밀접한 관계였던 베스푸치(Vespucci) 가문의 유부녀였다. 메디치와 베스푸치 가문은 당시 많은 예술가들을 후원하고 있었다. 보티첼리 또한 그들의 후원을 받는 예술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엘리너 포르테스쿠- 브릭데일(Eleanor Fortescue-Brickdale)의 <보티첼리의 작업실>을 감상해 보자. 시모네타와 로렌초 데 메디치(Lorenzo de' Medici) 등 메디치가 사람들이 보티첼리의 아틀리에를 방문해 인사를 나누고 있는 장면이 담겨있다.
시모네타의 뛰어난 미모는 신 플라톤주의(Neoplatonism)적 아름다움의 모델로 받아들여졌고, 시인들의 칭송의 대상이었다. 또한 그녀는 위대한 로렌조(Lorenzo the Magnificent)의 예술가들에 의해 불멸의 존재로 추앙받고 있었다.
시모네타는 1475년 피렌체에서 열린 마상시합 축제(jousting festival)에서 미의 여왕으로 뽑히는 등 피렌체 최고 미인이었던 그녀의 아름다움을 다양하게 보여주고 있는 작품 중 하나가 <프리마베라(Primavera)>다.
<프리마베라> 화면 중심에는 우아하게 옷을 입은 여인이 봄 정원의 주재자로 등장하고 있다. 그녀의 머리 위에는 사랑의 화살을 쏘는 변덕스러운 아기천사, 큐피드(Cupid)가 삼미신을 향해 활시위를 당기고 있다. 붉은 천으로 앞을 가리고 있는 그녀는 아프로디테(Aphrodite) 즉, 4월의 신 '비너스(Venus)’다. 이 인물 또한 보티첼리가 시모네타를 모델로 그린 여인으로 여겨지고 있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크로노스(Kronus)가 아버지 우라노스(Uranus)의 음경을 거세해 바다에 던져버렸다. 정액을 흘리며 바다를 떠다니던 생식기 주위에 하얀 거품(aphros)이 일어났고 그 속에서 아프로디테가 생겨났다.
보티첼리의 1482년 작 <비너스의 탄생>, 윌리앙 아돌프 부그로(William-Adolphe Bouguereau)의 1879년 작 <비너스의 탄생>, 콘스탄틴 마코프스키(Konstantin Makovsky)의 1910년 작 <비너스(아프로디테)의 탄생>를 나란히 감상해 보자.
그리스어로 아프로스(aphros)는 '거품'을, 아프로디테(Aphrodite)는 '거품에서 태어난 자'를 의미한다. ‘관능 또는 성애(sexual love)의 여신’으로 알려진 아프로디테는 로마 신화의 베누스(Venus, 비너스)에 해당된다. 이와 같은 서사(narrative)로 인해, 비너스(아프로디테) 도상은 전통적으로 관능적인 알몸으로 묘사되어 왔다.
그러나 보티첼리의 <프리마베라>에 등장하는 비너스는 다르다. 그녀의 머리에는 미사포 같은 베일(veil)이 씌워져 있고 위아래 고상한 의상을 갖춰 입고 있다. 또한 아직 가슴이 발달하지 않은 어리고 순결한 소녀의 이미지로 묘사했다.
그리고 표정과 포즈에서는 종교적 성스러움이 흘러나오고 있다. 그런데 임신한 듯, 배가 한껏 부른 비너스가 어딘가를 향해 손을 들어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그렀다면 태중의 아기와 손짓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걸까?
예수 그리스도의 수태를 예고한 사건을 그린 작품을 통해 그 의미를 추측해 볼 수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수태고지(Annunciation)>를 보자. 대천사 가브리엘이 처녀 마리아의 거처로 찾아가, 그녀의 태중에 하나님의 아들이 잉태될 것을 알리고 있다.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나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 루카복음 1장
전령사로부터 하나님의 아들을 임신해 출산할 것을 알게 된 동정녀 마리아는 당황하지 않고 한 손을 펴 들고 매우 침착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보티첼리의 비너스도 레오나르도의 마리아와 흡사한 손짓과 표정을 짓고 있다. 또한 비너스는 화면 중앙에 서서 임신부처럼 볼록 내민 배를 드러내고 있는데, 이 도상은 꽃의 도시 피렌체(city of flowers florence)에 '봄(Primavera)'이 잉태하길 기원하는 상징으로 해석되고 있다.
비너스는 잔뜩 불러온 배를 붉은색 의상으로 보호하려는 듯 조심스럽게 가리고 있다. 그녀의 붉은색 망토는 ‘신의 어머니’란 뜻을, 흰색의 드레스는 '흠 없고 죄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또한 비너스의 자궁 위치에 그려진 컵 모양으로 꺾인 옷의 음영은 성모의 옷에 새겨진 V자 도상과 유사해 보인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수태고지>와 <앉아있는 인물에 대한 의복 연구(Garment study for a seated figure)>를 감상해 보자. 고대 기호학에서는 남자를 Λ(Blade)로 여자를 V(Cup)로 표기했다고 전한다. 특히 V는 성스러운 피(왕족의 혈통)를 받아들이는 여성의 자궁, 즉 성배(聖杯, Holy Grail)로 해석되는 기호이기도 하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Piero della Francesca)의 브레라의 마돈나(Brera Madonna)라고 알려진 <성녀와 함께 있는 동정녀와 아기(The Virgin and Child with Saints)>를 보자. 성모 마리아와 예수는 성당 제단 뒤에 마련한 반달형 건축 공간인 에프스(apse) 아래에 좌정하고 있다.
보티첼리와 스튜디오의 <마돈나와 아이 2(Madonna And Child 2)>를 보자. 성모자는 동그란 후광(後光, halo)을 달고 있고, 아치(arch) 구조물에 둘러싸여 있다. 아치 구조는 상부에서 누르는 힘을 옆으로 분산시켜서 하중을 줄이고 변형을 막는 건축 기술이다. 더불어 이 구조물은 그 속에 위치한 인물에게 시각적으로 집중력을 높여주고 신비감과 성스러움을 부여한다.
보티첼리는 <프리마베라>의 어두운 배경 중앙에 월계수 잎으로 성당의 에프스(apse)를 연상시켜주는 아치 공간을 구성했다. 반원 모양 월계수 숲은 자연스럽게 비너스의 두상과 몸 전체에 빛너울(후광 효과, halo effect)을 만들어냈다.
성애(性愛)와 관능의 여신 이미지가 강한 비너스(아프로디테)를 성모 마리아 즉, 신의 어머니로 꾸미기 위해 화가가 의도적으로 설치한 시각적 장치로 해석된다.
보티첼리는 전 생애에 걸쳐 '자신만의 비너스' 즉 시모네타를 향한 사랑과 미의 개념을 종교적 숭고함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애써 힘을 다한 듯싶다.
<세라핌과 영광의 마돈나(Madonna in Glory with Seraphim)>를 감상해 보자. 성모 마리아는 무릎 위의 아기 예수를 양손으로 안고 있다. 화가는 세라핌(Seraphim, 치천사) 무리와 빛의 광선을 연기나 구름처럼 보이게 묘사해 병풍처럼 꾸몄다. 배경이 만들어낸 아치 형상은 <프리마베라>에서처럼 그녀를 둘러싸면서 성스럽고 거룩한(holy) 효과를 더해주고 있다.
자신의 아들을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는 영광의 마돈나는 꽃처럼 아름답지만 연약하고 슬퍼 보인다. 그녀는 아기 예수(Christ Child)가 세상의 죄로 인해 끔찍한 죽음을 맞이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보티첼리는 이런 슬픈 분위기를 진한 회색의 세라핌 아치 군상을 통해 우울한 공기처럼 묘사했다.
시모네타가 세상을 떠난 지 약 8년 뒤 그린 보티첼리의 제단화 <바르디 마돈나(Bardi Madonna)>를 보자. 아기를 안고 있는 마리아와 두 명의 성자가 등장하고 있다. 보티첼리는 성모 마리아와 두 성자 즉, 세례자 성 요한(Saint John the Baptist)과 복음사가 성 요한(Saint John the Evangelist) 두상 주변에 식물로 꾸민 아치형 형상을 그려 넣었다.
이 작품을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비너스의 탄생>과 함께 보면, 두 작품에서 양식적 유사성이 발견할 수 있다. 만약 <바르디 마돈나>에서 마리아가 무릎 위에 아기 예수가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서었다면 <비너스의 탄생>에 등장한 비너스와 매우 비슷한 자세를 연출하고 있는 셈이다.
마사치오(Masaccio)의 템페라 <낙원에서의 추방(Expulsion from the Garden of Eden)>에서 벌거벗은 이브는 '베누스 푸디카' 자세로 통곡하듯 울고 있다. '베누스 푸디카(Venus Pudica)'는 서양미술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푸디카(pudica)'라는 단어는 라틴어 'pudendus'에서 왔다. 이것은 외부 생식기나 수치심(shame)을 의미하거나 또는 둘 다를 의미한다.
누드 여성이 오른손을 들어 가슴을 가리고 왼손은 치부(恥部)를 숨기려는 고전적인 이 자세를 보통 '겸손한 자세' 또는 '정숙한 자세'라고 부르기도 한다. 보티첼리의 <바르디 마돈나(Bardi Madonna)와 <비너스의 탄생>에서도 이와 유사한 포즈를 발견할 수 있다.
<비너스의 탄생> 속 비너스의 목(Neck)은 현실과 동떨어지게 길고, 어깨는 해부학적으로 불가능하게 기울어져 있다. 이러한 묘사는 작가가 등장인물의 아름다움을 강조하기 위한 시도로 해석된다. 좌측으로 기울어진 두상, 초점 없는 시선,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 그리고 왼손 포즈 등 푸디카 자세(The Pudica Posture)에서 보여준 유사한 도상들이 <프리마베라> 곳곳에서 변주처럼 이어진다.
<프리마베라>에서 비너스 우측에는 ‘봄과 꽃의 여신 플로라(Flora)’가 등장한다. 꽃을 뿌리며 봄을 알리는 플로라 또한 화가가 시모네타(Simonetta)를 모델로 그린 것이다. 보티첼리는 폐결핵으로 고생하다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난 그녀를 꽃의 여신 플로라로 묘사했다.
그래서일까, 봄의 정원에 꽃을 뿌리는 여신 플로라의 경쾌한 발걸음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녀의 안색은 환자처럼 피곤해 보인다. <프리마베라>에 등장한 봄과 꽃의 여신 '플로라(Flora)' 부분도를 감상해 보자.
가벼운 열이 지속되며, 기운이 서서히 빠지고 뺨은 상기된 채 광대뼈가 솟아나고 눈은 휑해지며 산송장이 되어 간다. - 서기 2세기경 결핵 환자들의 얼굴을 묘사한 터키 의사 아레테우스.
새하얀 피부에 가냘픈 얼굴은 서양 미인의 조건 중 하나다. 그러다 보니 감염병 중 폐결핵은 ‘아름다운 질병’으로 여겨지곤 했다. 하얀 피부를 선호하던 당시 미인상이 핏기 없이 해쓱해진 폐결핵 환자의 얼굴을 아름답다고 착각하게 한 것이다.
결핵균에 감염되어 발열, 기침, 식욕부진 등으로 숨지기 전 몇 달 동안 힘겨워했을 피렌체의 대표 미인 시모네타 베스푸치. 급격한 체중감소로 여위고 발열로 홍조 띤 그녀의 얼굴을 화가는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보티첼리는 병든 기색이 짙어 보어 보이는 그녀의 얼굴을 신플라톤주의 이념인 천상의 미와 우아함을 담아 이상적인 꽃의 신 플로라로 그려냈다.
소묘(drawing) 작품 <시모네타 베스푸치>와 나무 위에 템페라 작업으로 완성한 <젊은 여인의 초상화 또는 시모네타의 초상화>를 감상해 보자.
당시 피렌체에서 가장 큰 재력가였던 메디치가의 후원을 받으며 최고의 성과물을 창조했던 보티첼리. 하지만 그는 말년에 이르러서는 사람들에게 거의 잊혀진 예술가로 전락한다.
루트비히 폰 랑겐만텔(Ludwig von Langenmantel)의 <방탕에 반대하는 설교를 하는 사보나롤라(Savonarola Preaching Against Prodigality)>를 보자. 산 마르코 수도원의 수도원장이자 종교 개혁가인 지롤라모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가 열광적으로 설교하는 모습과 모여든 군중들의 반응을 생생하게 그린 작품이다.
사보나롤라는 예언가적인 설교를 통해 쾌락이 초래할 타락의 위험을 전했고, 그 메시지는 당시 피렌체 사람들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한편 사보나롤라의 설교를 듣고 커다란 감명을 받은 보티첼리는 그의 열열한 추종자였으며 자신의 전 재산을 성당과 수도원에 기증하고 가난한 생활을 했다고 전해져 온다. 수도자 사보나롤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던 그가 말년에 완성한 걸작 <슬픔의 남자(The Man of Sorrows)>를 감상해 보자.
슬픈 남자는 머리에 가시관을 두르고 있고 못 자국이 선명한 양손은 굵은 줄에 묶여있다. 어두운 두상 주위에는 그가 당한 수난의 도구를 들고 있는 천사들이 등장한다. 보티첼리는 온갖 고난 끝에 죽은 후 부활한 예수와 기독교의 신앙을 상징적 도상으로 묘사했다. 또한 슬픈 남자 즉, 예수 그리스도를 화가만의 스타일을 살려 매우 인간적이면서도 현대적 초상으로 표현했다.
제법 갖고 있었던 자신의 재산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궁핍한 노년을 보냈던 보티첼리는 말년이 되자 질병으로 인해 똑바로 설 수가 없을 정도로 몸이 쇠약해졌다고 한다. 두 개의 목발에 의지한 노년을 보내다가 1510년, 65세가 된 그는 지병을 이기지 못하고 숨을 거둔다.
시모네타가 세상을 떠난 지 34년이 지난 어느 날, 보티첼리는 죽음을 앞두고 솔직한 유언을 남겼다.
“나의 비너스 시모네타의 발치에 나를 묻어 주오.”
베스푸치 가족은 늙은 화가의 유언을 받아들였다. 시모네타 베스푸치의 묘소는 피렌체에 있는 베스푸치 가문의 교구 교회인 오니산티 성당(Church of Ognissanti)에 있었다. 보티첼리는 자신의 소원대로 1510년 오니산티 성당 안의 시모네타 묘소 옆에 누웠다. 지금도 그의 매장지는 성당 바닥에 원형 엠블럼으로, 귀족 시모네타 베스푸치의 매장지는 배너 엠블럼 마크(banner emblem marks)로 남아있다.
사랑의 여인 비너스(Venus) 앞에서 한 남자가 알몸으로 깊은 잠에 빠져있다. 전쟁과도 같은 사랑의 폭풍이 끝난 후, 군신 마르스(Mars)는 기절하듯 누워 세상모르고 깊은 수면에 들어간 것이다. 갑옷과 투구를 벗고 곯아떨어진 전쟁의 신 마르스를 비너스가 바라보고 있다. 보티첼리의 <비너스와 마르스(Venus and Mars)> 속 비너스의 모델도 시모네타로 추정되고 있다.
결국 보티첼리는 영원한 수면에 빠진 후, 그림에서처럼 시모네타의 발끝에 누워 항상 그녀 옆에 머물게 되었다. 오늘도 피렌체 오니산티 성당 앞을 흐르는 아르노 강물(Fiume Arno)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