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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환 Oct 24. 2021

홀아비 앞에 나타난 헨드리케

-  < 첫사랑에 이어 두 번째 사랑이 > # 2


렘브란트, <어린 아이를 무릎에 앉힌 여자>, 1645~50 / 렘브란트, <무릎에 두 손을 꼭 쥔 채 앉아 있는 여인>, 1634~35, Pen, brush, brown ink

그의 첫 번째 아내 사스키아(Saskia)는 결혼 후, 잇달아 세 아이를 임신 했으나 출산 후 모두 어린 나이에 숨졌다. 렘브란트가 서른 살이 되던 해, 아들 륌베르투스가 죽었다. 그리고 이년 뒤 첫째 딸 코르넬리아 그리고 둘째 딸마저 세상을 떠난다. 

펜과 붓 그리고 갈색 잉크로 그린 <어린아이를 무릎에 앉힌 여자(A Woman with a Little Child on her Lap)>와 <무릎에 두 손을 꼭 쥔 채 앉아 있는 여인(A Seated Woman with Hands Clasped in her Lap)>을 감상해 보자. 

렘브란트, <아이를 안고있는 사스키아(Saskia with a Child), 1635~36, 펜화 / 렘브란트, <어린 아이를 무릎에 앉힌 여자>, c. 1635, 펜화

렘브란트의 <아이를 안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여인(Woman Carrying a Child Downstairs)>을 보자. 꽤 무거워 보이는 아이를 버겁게 안고 한 여인이 계단을 내려오고 있다. 화가는 여인의 머리 장식과 휘날리는 치맛자락의 옷 주름을 갈색 물감과 펜으로 생생하게 묘사했다. 여인을 사스키아로 추측하는 해설가들에 의해 이 습작 스케치(Sketch and study)는 <아이를 안고 있는 사스키아(Saskia with a Child)로도 불리고 있다. 


펜화 <어린아이를 무릎에 앉힌 여자(A Woman with a Little Child on her Lap)>를 보자. 사스키아는 자녀 셋을 모두 잃고 마지막 넷째 아이를 임신했다. 그리고 아들 티투스를 출산하느라 그녀는 기력을 잃고 점점 쇠약해졌다.

렘브란트, <웃고 있는 젊은 여성의 흉상, 아마도 사스키아>, 1633, 유화

사스키아는 그 당시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글을 읽고 쓸 줄 알았던 교양 있는 여성이자 부잣집 출신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죽은 후, 남편이 거액의 유산을 부실하게 관리해 하나밖에 없는 자식 티투스를 고아원에 보낼까 두려워했다. 

<웃고 있는 젊은 여성의 흉상, 아마도 사스키아(Bust of a Young Woman Smiling, possibly Saskia van Uylenburgh)>를 감상해 보자.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던 그녀는 아들 티투스와 유산을 지키기 위해 남편의 재혼을 막는 유언장을 작성했다. 그리고 한 달 뒤, 아들의 첫 돌을 앞두고 1642년 그녀는 세상을 떠난다. 

잦은 출산과 아이를 잃은 연속적인 충격은 사스키아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 하지만, 미술사가들은 그녀의 직접적 사인을 결핵으로 추정한다. 결핵균에 의해 감염되는 이 질환은 당시에는 제대로 치료가 어려워 많은 사람들의 사망 원인이었다. 

렘브란트, <성 캐서린 역의 사스키아(Saskia as Saint Catherine)>, 1638,에칭 / 렘브란트 이후, <예술가의 아들 티투스>, copy. c.1656, 에칭

사십 대 초반의 렘브란트는 결혼한 지 8년 만에 갓 서른을 넘긴 아내를 잃었다. 이제 홀로 지내야 하는 렘브란트에게 어린 아들 티투스(Titus van Rijn)를 돌봐줄 보모(babysitter)가 절실했다. 에칭 <성 캐서린 역의 사스키아(Saskia as Saint Catherine)>를 보자. 화가 아내 사스키아를 성 케서린(Saint Catherine)으로 분장시켜 작업한 작품으로 해석되고 있다. 

렘브란트 이후(After Rembrandt)의 작품 <예술가의 아들 티투스(The  Artist's Son, Titus)>도 옆 작품처럼 징크판이나 동판에 왁스 등으로 피복작업을 한 후, 못이나 바늘 같은 날카로운 물체로 그림을 그리는 판화 기법을 통해 제작된 에칭(Etching)이다.

렘브란트, <큰 자화상>, 1652 / 렘브란트, <팔짱을 낀 여인의 초상, 아마도 헨드리케(Hendrickje Stoffels)>, 유화, c. 1640~ 1690 사이

아내 없이 어린 아들을 키우고 있던 사십 대 중반의 홀아비 화가 앞에 한 여인이 등장한다. 이십 대 초반의 헨드리케 스토펠스(Hendrickje Stoffels, 1625-1662)였다. 이 아가씨는 어려서부터 힘든 가정에서 자란 탓에 강인한 생활력이 몸에 밴 여성이다. 1647년, 렘브란트의 어린 아들 티투스의 보모로 들어온 그녀는 화가 렘브란트와 점점 가까워지다가 동거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가 사십 대 중반에 그린 <큰 자화상(Large Self-Portrait)>을 보자. 1652년, 화가에게 경제적 시련이 찾아온 해에 그린 이 작품은 이전의 자화상에서 보여주었던 화려한 옷차림과 자신감 넘치는 표정은 더 이상 보이질 않는다. <팔짱을 낀 여인의 초상, 아마도 헨드리케 스토펠스(Portrait of a Lady with Hands Folded, Probably Hendrickje Stoffels)>를 보자. 화가는 그녀를 매력적인 이목구비를 갖춘 아름다운 여인으로 묘사했다. 

렘브란트, <창가에 앉아 눈을 뜨고 있는 헨드리케 스토펠스>, c. 1655~56, 종이에 갈색 잉크 / 렘브란트,<창틀에 기대고 있는 어린 소녀>, 1645

보모(babysitter)로 입주한 헨드리케는 어리고 병약한 티투스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황폐해진 주인 렘브란트를 돌보며 한 가정의 먹고사는 부분까지 챙겨야 할 처지가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전처의 아들을 자신의 자식처럼 돌보았다. 또한 가난한 화가의 작품 모델 역할까지 하면서 쓰러져가는 가정을 헌신적으로 꾸려나갔다. 갈색 종이 위에 갈색 잉크로 그린 <창가에 앉아 눈을 뜨고 있는 헨드리케 스토펠스(Hendrickje Stoffels seated at a Window, eyes open)>를 보자.

1654년, 화가와 헨드리케 사이에서 딸이 태어났다. 사랑스러운 딸의 이름은 렘브란트의 돌아가신 어머니 이름을 따서 코르넬리아(Cornelia van Rjin)로 지었다. 입주 하녀로 들어와 정부(애첩)가 된 헨드리케는 법적 부인은 아니지만, 딸의 출생으로 인해 실제적인 배우자의 지위를 갖게 되었다. 1645년 작품 <창틀에 기대고 있는 어린 소녀(A Young Girl Leaning on a Window-Sill)>을 보자. 화가는 이전의 작품들에 비해 밝은 배경 그리고 부드럽고 은은한 빛으로 주인공을 돋보이게 묘사했다.

렘브란트(Attributed to Rembrandt), <헨드리케의 초상>, c.1654-6 또는 c. 1659

헨드리케는 결혼식과 정식 부인의 지위를 갖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렘브란트를 진심으로 사랑하며 돌봤다. 전처 사스키아의 어린 아들 티투스를 자신이 낳은 자식처럼 양육했다. 

딸 코르넬리아가 태어나고 얼마 지나 완성된 <헨드리케 스토펠스의 초상(Portrait of Hendrickje Stoffels)>을 보자. 주인공이 어깨에 걸쳐 입는 여자용 모피 외투(Fur Wrap)를 두르고 있기에 이 작품은 <모피 랩을 두른 헨드리케(Hendrickje with Fur Wrap)란 제목으로도 불린다. 

그녀의 머리는 보석과 진주 귀걸이로 꾸며져 있다. 값이 나가 보이는 모피 랩과 금 목걸이는 렘브란트가 그녀에게 준 선물인 듯싶다. 화가는 주인공이 오른손에 지팡이를 쥐고 있는 구도를 선택했다. 고풍스러운 지팡이와 보석들은 헨드리케를 향한 화가의 존경심과 애정 그리고 감사함이 담긴 도상으로 해석된다.

렘브란트, <열린 문에서의 헨드리케>, 1656, 유화 / 렘브란트, <창밖을 내다보는 어린 소녀>, c. 1651, 잉크 드로잉 / 렘브란트, <창가의 어린 소녀>, 1651

렘브란트의 1656년 유화 <열린 문에서의 헨드리케(Hendrickje at an Open Door)>를 보자. 한 여성이 문에 기댄 채 격식을 차리지 않은 포즈로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다. 그녀의 화려하게 꾸미지 않은 편안해 보이는 옷차림은 모델과 화가의 관계가 익숙한 사이임을 드러내고 있다. 이로 인해 이 여인은 당시 동거자인 헨드리케일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갈대 펜(Reed-pen and bistre)으로 그린 드로잉 <창밖을 내다보는 어린 소녀(Young Girl Looking out of a Window)>와 <주방 하녀(The Kitchen Maid)>란 제목을 갖고 있는 유화 <창가의 소녀(Young Girl at the Window)>를 나란히 감상해 보자.


렘브란트, <젊은 여자의 초상화 또는 벨벳 베레모를 쓴 헨드리케 스토펠스>, c. 1654 또는 1650~1655년 사이,Oil on canvas, 72 x 60 cm

렘브란트는 헨드리케와 평생 정식 결혼을 못 하고 살았다. 법적으로 부부가 아닌 남녀가 한집에서 동거하는 것은 당시 손가락질을 받는 커다란 죄였다. 그럼에도 렘브란트가 헨드리케와 결혼을 할 수 없었던 진짜 이유는 첫 부인 사스키아가 죽으면서 남긴 유언장 내용 때문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유언장에 따르면 렘브란트가 재혼을 할 경우, 그는 사스키아 유산(한화로 약 19억 원 추정)의 상당 부분을 아들 티투스에게 즉각 넘겨주어야 했다. 극심한 재정 위기에 처했던 렘브란트는 아내의 유산을 차지하기 위해, 사랑하는 여인 헨드리케와의 결혼을 포기한다.

딸 코리넬리아가 태어나기 전후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헨드리케 스토펠스의 초상화 또는 벨벳 베레모를 쓴 헨드리케 스토펠스(Portrait of Hendrickje Stoffels or Portrait of Hendrickje Stoffels in a velvet beret)>를 감상해 보자.

렘브란트, <예술가의 아들 티투스(The Artist's Son Titus)>, 1657 / 렘브란트, <헨드리케 스토펠스의 초상>, 1659, 유화

렘브란트의 유화 <예술가의 아들 티투스(The Artist's Son Titus)>를 보자. 붉은 베레모와 볼륨 감 있는 머리카락이 인상적이다. 사슬로 장식된 16세기 베네치아 의상 위에 사슬로 장식된 목걸이가 반짝이고 있다. 화가의 빛과 어둠의 색조 대비를 살린 붓질이 초상화 속 인물을 실물처럼 보이게 한다.

서로 비슷한 시기에 그려 <헨드리케 스토펠스의 초상(Portrait of Hendrickje Stoffels)>을 보자. 또 다른 제목 <실크 랩을 씌운 헨드리케 스토펠스의 초상(Portrait of Hendrickje Stoffels in silk wrap)이 강조하고 있듯 그녀는 몸에 실크 랩(silk wrap)을 두르고 있다. 

렘브란트, <헨드리케를 모델로 그린 렘브란트의 초상화>, c. 1800~1850 / 렘브란트, <비너스와 아모르(Venus and Amor)>, c. 1640-1660, 유화

그들은 끔찍한 가난 속에서 서로를 연민하며 사실상 한집에서 부부처럼 지냈다. 또한 헨드리케는 틈틈이 화가의 그림 모델이 되어, 궁핍의 시간을 그의 옆에서 함께 지낸다. 그녀는 교육을 받지 못해 읽고 쓰는 능력이 부족했지만 렘브란트의 완벽한 동반자였다. 렘브란트는 자신보다 20살이나 어린 헨드리케에게 늘 감사해하며 애정과 감사의 마음을 담아 그녀를 신화나 성경 속의 아름다운 주인공으로 묘사했다. 

<헨드리케를 모델로 그린 렘브란트의 초상화(Portrait of Rembrandt while painting Hendrickje as his Model)>를 감상해 보자. 화면 속 나신의 여인은 이스라엘 다윗왕과 관계 후, 솔로몬 왕을 낳은 밧세바(Bathsheba)로 분장한 헨드리케이다. 이 작품은 렘브란트 또는 그의 추종자(follower)가 그렸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비너스와 아모르(Venus and Amor)>를 보자. 이 작품의 또 다른 제목은 <비너스와 아모르 역의 헨드리케 스토펠스와 코리넬리아(Hendrickje Stoffels en Cornelia als Venus en Amor)>다. 렘브란트는 헨드리케를 비너스로 꾸미고 어린 딸 코리 넬리 아 등에 날개를 다는 등 아모르(큐피드)로 분장시켜 화면에 배치했다.

렘브란트, <침대 위의 여인(Hendrickje in Bed)>, 1648/렘브란트, <강에서 목욕하는 핸드리케(Hendrickje Bathing in a River)>, 1654

이밖에도 <침대 위의 여인(Hendrickje in Bed), c. 1648 or c. 1657>, <강에서 목욕하는 핸드리케(Hendrickje Bathing in a River), 1654>, <목욕실의 밧세바(The Toilet of Bathsheba),1654> 등 동반자 헨드리케를 통해 렘브란트의 명작들이 쏟아졌다. 이처럼 침실 모습과 목욕 장면 작품들은 화가와 모델의 몸과 마음이 서로 친밀했기에 그릴 수 있는 작품들이다. 

<침대 위의 여인>에서는 한 젊은 여인이 침대에 기대어 왼팔로 붉은 금색 무늬 커튼을 옆으로 밀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강에서 목욕하는 핸드리케>를 보자. 한 여인이 풍성한 드레스를 벗고 목욕을 하기 위해 강물로 다가가고 있다. 자신의 치마를 허벅지까지 걷어올리고 조심스럽게 시냇물에 발을 내딛고 있는 모습이 자연스러우면서도 인상적이다.

 렘브란트, <플로라 모습의 사스키아(Saskia as Flora)>, 1634 / 렘브란트, <플로라 모습의 헨드리케(Hendrickje as Flora)>, 1654

그의 1634년 유화 <플로라 모습의 사스키아(Saskia as Flora)>와 1654년 작 <플로라 모습의 헨드리케(Hendrickje as Flora)>를 나란히 감상해 보자. <플로라 모습의 헨드리케(Hendrickje as Flora)>는 두 번째 아내 헨드리케를 꽃의 여신 플로라로 꾸며 그린 작품이다. 앞서 첫 번째 부인을 그린 1634년 작품 <플로라 모습을 한 사스키아(Saskia as Flora)>와 비교했을 때, 몇 가지 다른 분위기를 만날 수 있다. 

우선 두 여인의 장식품 등 패션을 통해 그들의 미적 취향 차이를 볼 수 있다. 또한 작품 제작 당시 화가의 제정적 형편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도상들이 등장한다무엇보다도 20년 세월 동안 크고 작은 풍파를 격은 화가의 인생과 예술에 대한 시각 변화를 볼 수 있다.

화가의 가장 젊은 자화상. 렘브란트, <젊은 날의 자화상>, 1628. / 화가의 신부 사스키아. 렘브란트, <사스키아의 초상화>, 1635

명암(明暗) 대비 효과를 극명하게 사용해 작품을 완성하는 회화기법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 이 기법을 능숙하게 화면에 담아냈던 빛의 화가 렘브란트. 그가 20대 초반에 그린 <젊은 날의 자화상(Self portrait as a Young Man)>은 화가의 40여 점 자화상 가운데 가장 초기의 작품이다. 젊은 화가는 그늘진 어둠 속에다 자신의 눈을 묘사했다. 키아로스쿠로 기법을 통해 빛과 어둠에 대한 매력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는 렘브란트의 걸작이다.

1635년 자신의 아내를 그린 작품 <사스키아의 초상화(Portrait of Saskia)>를 감상해 보자. 작가가 어리고 아름다운 자신의 신부를 뽐내려는 듯, 얼굴 등 주요 도상에는 강한 빛을 비추어 밝게 묘사하고 주변 배경은 어둡게 처리했다. 오늘날 렘브란트는 키아로스쿠로를 완성한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렘브란트, <플로라 모습의 헨드리케(Hendrickje as Flora)>,  부분도, 1654

첫 부인 사스키아를 잃은 후, 렘브란트의 강점인 '키아로스쿠로'를 비롯해 그의 화풍은 예전 분위기와 같지 않다. 그가 에칭(Etching)과 드로잉(drawing) 작업에 집중했다가 다시 회화(painting)로 돌아왔을 때, 렘브란트의 캔버스는 외로움과 고통의 신음 소리 그리고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었다. 그의 1654년 작품 <플로라 모습의 헨드리케(Hendrickje as Flora)> 부분도를 감상해 보자.

렘브란트, <플로라 모습의 사스키아(Saskia as Flora)>,  부분도, 1634 / 렘브란트, <플로라 모습의 헨드리케>, 부분도, 1654

<플로라 모습을 한 사스키아>에서 사스키아는 비스듬히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 반면 '헨드리케의 플로라'는 눈을 뜬 체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눈이다. 또한 머리의 꽃 장식은 헨드리케의 얼굴 표정처럼 무겁게 가라앉아있다. <플로라 모습의 헨드리케>에서 보여준 침울 한 색채와 거친 물감 처리는 밝고 화사하고 세심하게 묘사된 <플로라 모습을 한 사스키아>와 확연히 비교된다.

렘브란트, <플로라 모습의 사스키아(Saskia as Flora)>,  부분도, 1634

렘브란트는 풍성한 화관과 꽃 지팡이 그리고 거추장스러울 만큼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의복을 입은 플로라를 통해, 사스키아의 미모와 지성 그리고 부유함을 드러내려 했던 것 같다. 또한 불러온 배와 그 위에 얻은 손을 도드라지게 묘사하면서 ‘임신한 이 아름다운 여인의 남편이 나 렘브란트요’라며 과시하려는 듯 보인다.

티치아노(Vecellio Tiziano), <플로라(Flora)>, 1515 / 렘브란트, <플로라 모습의 헨드리케(Hendrickje as Flora)>, 1654.

<플로라 모습의 헨드리케(Hendrickje as Flora)>에서 플로라는 몸통을 정면을 향한 체, 시선은 측면을 향하고 있다.  그리고 오른손에 꽃을 쥐고, 앞으로 내미는 동작을 취하고 있다. 한눈에 봐도 렘브란트가 티치아노의 1515년 작품 <플로라(Flora)>에서 영감을 얻어 그렸음이 분명해 보인다. 

티치아노(Vecellio Tiziano), <플로라(Flora)>,  세부도, 1515 / 렘브란트, <플로라 모습의 헨드리케>,  세부도,  1654.

그러나 티치아노가 그린 플로라 손 안의 꽃과 비교했을 때, 헨드리케 오른손 꽃은 ‘꽃송이’ 라기보다는 ‘꽃 부스러기’를 쥐고 있는 것처럼 초라해 보인다. 겹겹이 풍성하게 부푼 흰 블라우스 소매에서 과거 렘브란트의 허영심과 수치심이 풍긴다. 

반면 손 안의 한 줌 꽃은 악화일로를 치닫고 있는 당시 렘브란트의 재정 상태와 빈곤한 삶을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가난과 구차한 삶에 허덕이던 1654년 경, 그가 그린 <플로라 모습을 한 헨드리케>는 상대적으로 단출하고 수수한 분위기다.

렘브란트, <작업실의 화가>, 1628년 경 /  렘브란트, <플로라 모습의 헨드리케>,  세부도,  1654.

'사스키아의 플로라' 즉 1634년 작 <플로라 모습의 사스키아(Saskia as Flora)>는  "나는 잘 나가는 렘브란트다"라며 자신만만해하던 시기에 밝고 화려하게 그려진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헨드리케의 플로라>는 피사체(헨드리케)의 눈을 통해, 화가가 자기 내면을 겸손하게 바라보며 덤덤하게 툭툭 그려 내려간 느낌이다.

렘브란트, <베레모와 옷깃을 세운 자화상>, 1659 (좌, 우)

많은 사람들이 <야경(The Night Watch), 1642)>, <베레모와 옷깃을 세운 자화상, 1659>, <돌아온 탕자(Return of the Prodigal Son), 1666> 등을 렘브란트의 대표작으로 꼽는 편이다. 그중 <베레모와 옷깃을 세운 자화상>은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의 세월 앞에서, 말없이 자신을 직면하고 있는 화가의 모습이 거친 붓질과 묵직한 색감으로 묘사되어있다.

미술사가들은 그의 대다수 대표작들이 1640년대 이후인, 세 자녀와 첫 아내 사스키아를 잃고 고통의 바다를 항해하던 시기에 탄생했다고 평한다.

렘브란트, <잠자는 젊은 여인, 헨드리케 스토펠스>, c.1654, 소묘 / 렘브란트, <렘브란트의 아들 티투스>, 1660

암스테르담 전역에 전염병이 퍼져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던 1663년 어느 날, 헨드리케는 37세라는 젊은 나이에 갑자기 사망한다. 렘브란트는 인생의 에너지와 의미를 잃었다. 그나마 잘 커가고 있는 외동아들 티투스가 옆에 있어 삶을 지탱하고 있었다. 렘브란트의 소묘(Drawing) <잠자는 젊은 여인, 핸드리케 스토펠스(A young woman sleeping, Hendrickje Stoffels)>를 보자. 

헨드리케가 세상을 떠난 후 아들 티투스는 결혼식을 할 만큼 성인이 되었다. 그러나 1668년 아들의 행복한 신혼생활이 반년쯤 지날 무렵, 아들마저 27살 나이에 세상을 떠난다. 이후 렘브란트의 삶은 급격히 무너져 내려가기 시작했다. <렘브란트의 아들 티투스(Rembrandt's son, Titus)>를 보자. 이 작품의 또 다른 제목 <수도사 차림의 티투스(Titus in a Monk's Habit)>에서 말하듯, 티누스는 프란체스코 수도사 복장(Habit)을 하고 있다. 

렘브란트, <웃는 제옥시스의 모습을 한 자화상(Self-Portrait as Zeuxis Laughing)>, 1662 / 동일 작품, 1668-69

아들의 초상화를 그린 지 약 2년이 지난 후, 렘브란트는 <웃고 있는 제옥시스 모습을 한 자화상(Self-Portrait as Zeuxis Laughing)>을 그렸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6년 전에 그린, 두 번째 마지막 작품이다. 렘브란트는 휘어진 어깨, 늙고 주름진 얼굴 등 자신의 나이 든 모습을 숨기지 않았다. 입가의 미소는 갖은 풍파를 겪은 화가의 초연해진 내면을 보는 듯싶다. 

렘브란트, <웃는 제옥시스의 모습을 한 자화상(Self-Portrait as Zeuxis Laughing)>, 부분도, 1662

세상의 모든 욕심과 허망한 것들을 다 떠나보낸 후 오히려 세상을 조롱하듯 웃고 있는 것만 같다. '웃어도 웃는게 아니야...' 그래서 이 작품은 도발적이다.


 빛나는 역량도 탁월한 성취도 안락을 주지 않으며, 분투할수록 수렁에 빠진다는 역설. 그래서 ‘역설을 깨닫게 한 고통과 허무 속으로’ 물러서는 그의 얼굴(자화상)은 전설 속의 노파(제옥시스) 같다. - 미술사가 이연식

렘브란트, <돌아온 탕자(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1663~1669, 유화

렘브란트의 마지막 작품이자 최고 걸작인 <돌아온 탕자(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는 아내 헨드리케와 유일한 아들인 티투스를 먼저 하늘로 보낸 시기에 탄생한 작품이다.

높고 거센 인생 파도를 통과하며 시련만큼 깎기고 다듬어진 렘브란트. 말년에 그는 작품을 통해 화려하고 아름다운 외형의 재현보다는 묘사 대상의 아픔과 상처, 후회와 용서 등 인간의 내면세계를 드러내는데 집중했다는 평을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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