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첫사랑에 이어 두 번째 사랑이 > # 1
방앗간 집 아들 렘브란트는 명문 집안의 딸 사스키아(Saskia)를 만나 연애를 했다. 27세 청년 화가의 끈질긴 구애 끝에 일 년 후인 1634년, 그녀와 결혼에 성공한다. 사스키아의 아버지는 레바르덴 시의 시장이자 변호사였다. 아버지로부터 엄청난 재산을 물려받은 그녀는 4만 길더(Guilder)나 되는 거액의 지참금을 가지고 화가에게 시집을 왔다.
<고르게를 쓴 렘브란트의 초상화(Portrait of Rembrandt with a Gorget)>를 감상해 보자. 이 초상화에서 젊은이는 목 보호용 갑옷, 고르게(Gorget)를 착용하고 있다. 곱슬머리에 산뜻한 다홍빛 뺨을 가진 청년은 감상자를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밝게 드러난 왼쪽 얼굴에서 23살 앳된 나이가 느껴진다. 화가는 명암 효과를 통해 자신의 미래에 대한 당당함과 불안을 동시에 묘사했다.
렘브란트의 심오하고 극적인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 기법을 통해, 빛과 그림자 사이의 강한 대비 효과를 잘 살려 묘사했다. 이 탁월한 붓질은 그를 다른 화가들과 구별시켜준다.
당시 렘브란트는 작품 한 점을 잘 팔면 100 길더를 받는 상황이었으니, 신부의 지참금은 그를 결혼과 동시에 큰 재산가로 만들었다. 또한 아내 집안의 도움으로 왕실과 인연을 맺은 그는 암스테르담의 유명 화가로 등극하면서 사회적 신분도 상승했다.
<사스키아 판 아윌렌뷔르흐의 초상(Portrait of Saskia van Uylenburgh)>를 보자. 어두운 배경에 배치된 여인의 옆얼굴과 상채는 선명할 뿐만 아니라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렘브란트는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을 극명하게 대비시켜가며 주인공을 묘사했다. 의상과 장신구의 정교한 착색과 리얼한 질감은 그가 당시 최고 화가임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사스키아와 결혼 전 연애시절에 그린 작품 <밀짚모자를 쓴 사스키아(Saskia In A Straw Hat)>를 보자. 어리고 아리따운 약혼녀에게 사랑에 빠진 화가는 자연스럽게 펜을 들었고 그녀는 입가의 미소로 화답하고 있다. 따뜻한 시선과 오른손의 꽃 한 송이에서 두 연인의 충만한 사랑이 느껴진다.
렘브란트의 에칭 <부드러운 모자와 자수 망토를 입은 자화상(Self Portrait in a Soft Hat and Embroidered Cloak)>을 보자. 당시 그는 암스테르담에서 최고의 초상화가라는 명성을 누리며 많은 수입과 제자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암스테르담에서 화가로서 입지를 굳히고 나름 잘 나가는 사업가였던 렘브란트. 그는 자신의 유명세가 올라가자 허영심도 커졌다. 자신의 작품으로 번 돈은 물론, 아내가 가져온 지참금까지 탕진하며 사치를 부렸다.
결혼 초기인 1639년, 렘브란트는 보란 듯이 암스테르담 중심부, 부자 동네에 새로 지은 고급 주택을 구입했다. 자신보다 신분이 높은 집안 딸과 결혼한 그가, 그에 걸맞은 수준의 생활을 유지하고 싶어서 선택한 결정 이리라. 하지만 신혼부부가 대출을 끼고 사들인 대저택은 무리한 투자였다.
그의 <34세의 자화상(Self Portrait at the Age of 34)>을 감상해 보자. 1640년, 호화로운 복장을 갖춘 인물에게서 위엄과 자신감 넘쳐 보인다. 자화상이 보여주듯 이때까지만 해도 그의 눈과 주먹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다.
그러나 1643년에서 1649년을 전후로 그에게 밀려들었던 작품 주문은 서서히 줄어들었다. 재정이 악화되자 그는 암스테르담 대저택과 관련해 잔금은 물론, 이자도 감당하지 못하는 상태에 빠진다. 결국 렘브란트는 은행 대출을 갚지 못해 신용불량자가 된다.
1635년 경 작품 <사스키아와 함께 있는 자화상(Self-Portrait with Saskia)> 속 인물은 아내와 렘브란트 자신이다. 그는 호박 넝쿨처럼 굴러온 신부를 무릎에 올려놓고 자축하듯 맥주잔을 높이 들고 있다. 사스키아는 비단과 벨벳으로 지은 고풍스러운 복장 그리고 고급스러운 머리띠와 귀걸이를 하고 있다. 렘브란트도 호화로운 모자와 붉은 옷 그리고 허리에 찬 황금빛 큰 칼로 자신을 치장했다.
이들의 외모는 풍요로운 황금기를 즐기고 있는 부부처럼 보인다. 화가는 완벽해 보이는 자신의 결혼생활이 주는 행복에 취해있다. 그 기쁨과 유쾌함을 자랑하려는 듯이 아내를 그는 무릎에 올려놓고 잔을 높이 들었다. 재미있는 도상은 사스키아의 표정이다. 그녀는 남편의 기쁨에 동참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불편한 감정을 감추려는 듯 어색해 보인다.
같은 주제를 그린 1635년 경 소묘작 <매춘업소의 탕자(The Prodigal Son in the Brothel)>과 <창녀들과 함께 있는 탕자(The Prodigal Son with the Loose Womenc)>를 감상해 보자. 작품 무대는 선술집 또는 매춘업소이고 집을 나온 탕자는 느슨한 여자(Loose Women, 창녀)들 사이에서 향락을 즐기고 있다.
유화 <사스키아와 함께 있는 자화상>에서 처럼 화가는 앞의 두 펜화에서도 아내 사스키아를 술집 여인으로 분장시켰고, 자신은 제멋대로 사는 탕자처럼 꾸며 입었다. 집을 나올 때 아버지에게 받은 유산을 술집에서 탕진하다 결국 거지가 된,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방탕한 청년 이야기를 그렸다. 그래서 이 작품을 <선술집의 방탕아(The Prodigal Son in the Tavern)>라고도 부른다.
돈을 흥청망청 쓰며 자신을 과시하고 있는 방탕아의 모습에서, 결혼과 함께 신분상승과 큰 재산을 거머쥔 신랑 렘브란트의 일면을 보는 듯하다. 결혼 후 줄곳 과시적인 씀씀이와 지나친 수집벽을 이어가고 있는 남편을 보면서 사스키아는 불안해하고 있었다.
사스키아는 모델이 되어 이젤(easel) 앞에 섰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에 대한 못마땅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있다. 렘브란트 또한 아내의 불편한 속내를 뻔히 알면서도, 그녀의 뾰로통한 표정을 남의 마누라 흉보듯 그대로 묘사했다.
렘브란트의 1636년 판화 <사스키아와 함께한 자화상(Self-Portrait with Saskia)>를 감상해 보자. 사스키아의 시선은 초점도 안정감도 없어 보이는 심란(心亂) 그 자체다. 화가는 모자 그늘을 이용해 자신의 눈가를 의도적으로 어두컴컴하고 스산해 보이는 분위기로 만들었다. 이들 부부에게 겹겹이 불어닥칠 잔인한 폭풍을 렘브란트는 자화상을 통해 예언하듯 묘사하고 있다.
승승장구 잘 나가기만 할 것 같았던 젊은 화가 렘브란트에게 큰 시련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가 서른 살 되던 해, 첫아들 륌베르트스가 태어났지만 두 달 만에 죽는다. 이후 태어난 세 자녀가 줄줄이 영아 사망하던 시기에 그린 <침대에 누워있는 사스키아, 그녀의 발치에 앉아있는 여인(Saskia Lying in Bed, a Woman Sitting at Her Feet)>을 감상해 보자.
침대 위에서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겨있는 사스키아. 간단한 선으로 묘사된 얼굴이지만 깊이감 있는 표정은 감상자에게 울림을 준다. 감당키 어려운 힘든 일을 연거푸 당한 산모가 넋이 나간 듯이 멍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 발치에 앉아있는 여인은 비극의 주인공을 마주하기가 민망한 듯 시선을 피하고 있다.
그러던 사스키아는 어렵사리 네 번째 아이를 임신해 아들을 낳는다. 1641년, 넷째 티투스(Titus van Rijn)를 출산 후 시름시름 앓던 그녀는 결국 몸을 푼 지 1년도 안된 1642년 세상을 떠난다. 사인은 결핵에 의한 폐렴과 출산 후유증으로 추정된다.
펜과 붓 그리고 갈색 잉크로 그린 렘브란트의 습작 스케치(Sketch and study) <어린아이를 무릎에 앉힌 여자(A Woman with a Little Child on her Lap)>, <사스키아, 창턱에 기대고 있는 여인(Saskia, Woman Leaning on a Window Sill)>, <침대에 누워있는 여자(A Woman Lying in Bed)>를 함께 감상해 보자.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소년의 초상화(Portrait of a Boy in Fancy Dress)>를 감상해 보자. 친밀감이 느껴지는 소년의 얼굴은 매우 섬세하게 묘사되어있다. 상대적으로 완성도가 높은 눈, 머리카락, 옷깃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미완성으로 끝난 이 작품은 화가의 작업 방식에 대한 중요한 통찰력을 제공하고 있다. 소년의 왼쪽 어깨에는 추상적인 이미지가 자리하고 있지만 미완성작품인 탓에 앵무새 또는 원숭이로 추측되고만 있을뿐이다. 화가의 아들로 보는 견해를 따라 <예술가의 아들 티투스의 초상화(Portrait of the Artist’s Son Titus)> 또는 <렘브란트의 아들 티투스(Rembrandt's son Titus)>란 제목으로도 불린다.
티투스가 태어난 해에 그린 유화 <붉은 꽃을 들고 있는 사스키아(Saskia with the red flower)를 보자. 화가는 그녀를 꽃과 풍요의 여신 플로라(Flora)로 꾸미려는 듯 손에 꽃 한 송이를 쥐게 했다. 이 카네이션(Carnation)이 붉은색이라면 순수하고 열정적인 사랑을, 노란색이라면 실망과 거절을, 분홍색이라면 성모 마리아의 눈물을 나타내기 때문에 모성애를 상징한다. 사스키아는 다음 해에 9개월밖에 안된 갓난 아들 티투스를 남겨두고 세상을 등졌다. 그리고 이 작품은 생전에 그려진 사스키아의 마지막 초상화가 되었다.
티투스가 태어나고 사스키아가 사망하던 시기에 렘브란트는 그림 주문을 받는다. 암스테르담 시민 수비대 가운데 하나인 클로베니에르(Kloveniers) 사수 조합(射手組合)이 본부 건물에 걸어놓을 단체 초상화를 의뢰한 것이다. 렘브란트는 이 주문 작품을 일반 집단 초상화와 차별화하기 위해, 이십여 명의 등장인물들을 마치 연극처럼 연출시켜 생동감 넘치는 대형 작품(437 x 363 cm)으로 제작했다.
한편 <야간 순찰(The Night Watch)> 속에는 작은 체구지만 조명을 받아 도드라져 보이는 한 소녀가 등장한다. 흐르는 듯한 금발 머리와 화려한 금색 드레스로 빛나는 소녀의 가장 흥미로운 도상은 허리띠에서 거꾸로 매달린 커다란 흰색 닭이다. 허리춤에 수탉을 차고 있는 이 가상의 인물은 클로베니에르의 상징(emblem)인 날카로운 황금 발톱(golden claw)을 든 수호신 즉, 사수 조합의 마스코트 역할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렇다면 화려한 머리 장식과 빛나는 금빛 복장을 한 이 여인은 누구를 모델로 그린 것일까? 여인의 얼굴 특징과 신화 속 여인을 자기 애인으로 꾸민 후 작품에 그려 넣는 렘브란트의 화풍을 놓고 볼 때, 렘브란트의 아내로 추정된다.
<야간 순찰>에서 화관을 쓴 키 작은 소녀는 당시 병으로 누워 고생하고 있던 화가의 아내 사스키아(Saskia)가 분명하다. 렘브란트는 아내가 빨리 회복되어 건강해지길 바라는 심정으로 건장한 시민 수비 대원 속에 아내를 수호신처럼 그려 넣었을 것이다.
렘브란트는 아내를 자신의 작품 속에 신화 속 인물로 그려 넣으며 자신의 사랑과 애정을 표시하곤 했다. 그는 사스키아가 첫 아이를 임신하자, 그녀를 '꽃의 여신 플로라(Flora)'로 분장시켜 그렸다. 렘브란트는 사스키아에게 화관(花冠)을 씌우고 동양풍의 금빛 의상을 입혔다. 그리고 자신의 아이를 잉태한 아내의 배 위에 세상 보란 듯이 밝은 조명을 비췄다.
그러나 <야간 순찰>이 공개됐을 때, 세간에서 악평이 쏟아졌고 그는 화가의 명성과 고객을 잃게 되었다. 이 작품이 발표된 1642년은 렘브란트의 아내 사스키아가 질병으로 사망 한 해 이기도 하다. 유일한 자식이자 돌도 안 지난 아들 티투스를 뒤로하고 그녀는 29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혹평과 비난에 휩싸인 작품 <야간순찰>로 인해, 렘브란트는 화가로서 인기가 급락했다. 그림 주문이 급속히 줄면서 급기야 빚더미에 앉았다. 그의 유화 <창가의 자화상(Self-Portrait by the Window)>를 감상해 보자. 렘브란트는 왼쪽 창가에 앉아 뭔가 작업을 하다가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평범한 모자에 아무런 장식이 없는 수수한 복장을 하고 있다. 얼굴에서는 젊은 날 우쭐거리며 잘난 체하던 표정은 하나도 찾아볼 수가 없다.
실의와 외로움에 빠진 그는 유일한 핏줄이자 희망인 어린 아들 티투스를 돌보며 힘든 세월을 보내야 했다. 유화 <책상에 앉은 예술가의 아들 티투스(The Artist's Son Titus at His Desk)>를 보자. 서류로 보이는 종이 위에 손을 올리고 앉은 소년이 생각에 잠긴 듯 먼 곳을 응시하고 있다. 오른손에는 펜을 왼손에는 잉크병과 펜 케이스를 들고 있다. 두 작품이 매우 닮은듯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데 가장 큰 요인은 모델의 상반신 포즈가 만든 삼각형 구도(triangle composition)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궁핍한 생활 속에서도 그는 화가의 그림 작업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미술작품과 고가의 골동품들을 사 모으는 취미 활동을 이어 나갔다. 렘브란트의 1635년 유화 <깃털 모자를 쓴 자화상(Self-portrait in a Feathered Hat)>을 보자. 화가는 두 개의 수직 타조 깃털이 달린 화려한 벨벳 모자와 값이 나가 보이는 의상과 장신구로 몸을 치장하고 있다.
그는 강박적으로 예술품들을 구매했고 거의 중독증에 가까웠다. 작가로서의 존재감과 가족을 잃은 외로운 홀아비의 헛헛함을 채우기 위한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주변 사람들 특히 처가 식구들은 사스키아가 남겨준 유산 등 재산을 렘브란트가 탕진한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그의 수집벽은 멈추지 않았다.
그의 에칭 <칼을 든 자화상(Self Portrait with Raised Sabre)>에서 화가는 유럽의 기병이 사용하는 전투용 검, 사브르(Sabre)를 들고 있다.
고가의 골동품 수집 취미는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경제적으로 어두운 그림자를 남겼다. 50대 초반 렘브란트는 투자한 사업이 실패로 끝나자 저택과 모든 물품을 경매당하는 수모를 당했다. 알거지 신세가 된 그는 빚을 갚기 위해 땅에 묻힌 아내 사스키아의 묘지까지 팔아야 했었다.
그러나 렘브란트의 손때와 인생사가 배어 있는 다양한 수집품들은 그의 명화 속에서 빛나는 도상들로 남아있다. 구약성경 판관기(사사기)에 등장하는 삼손 이야기를 그린 <델릴라에게 배신당한 삼손(Samson Betrayed By Delilah)>를 감상해 보자. 델릴라의 품에서 잠들어있는 장수 삼손의 허리에 엔틱 한 칼 한 자루가 매달려 있다.
렘브란트는 검, 단검(dagger), 활뿐만 아니라 활 케이스와 화살통 등 골동품(Antique) 무기 수집에 빠져 있었다. 동양 전투 무기(oriental weapons)에 관심이 컸고, 특히 칼과 창 수집에 열을 올린 덕에 그의 작품에서는 칼과 창이 자주 등장하는 편이다.
유화 <눈이 멀게 된 삼손(The Blinding of Samson)>을 보자. 좌측 남자는 인도 남부의 창으로 보이는 무기로 삼손을 위협하고 있다. 화면 중앙의 갑옷의 군인은 칼자루에 인체가 조각된 아시아 전통 무기 크리스(Keris)로 보이는 단검으로 삼손의 오른쪽 눈을 찌르고 있다.
그의 에칭 <깃털이 달린 벨벳 모자를 쓴 자화상(Self-Portrait in a Velvet Cap with Plume)>을 감상해 보자. 화려한 모자와 한껏 모양을 낸 콧수염과 머리카락에서 한창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는 전성기의 렘브란트를 엿볼 수 있다.
이 무렵 재산과 유명세를 거머쥔 렘브란트는 사람에게 고상한 예술가로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는지도 모른다. 그의 거만한듯한 눈매와 입 모양 그리고 값비싼 옷으로 한껏 치장한 외모에서 거칠 것 없는 의기양양함이 느껴진다.
50대 초반에 그린 <지팡이를 든 자화상(Self-portrait with a Staff)>을 감상해 보자. 그는 재산을 모두 잃고 망해 빌린 빛 조차 갚을 수 없는 상태가 되자 2년 전 파산을 선언했었다. 이 같은 위기 중에도 그는 경매장, 화상, 행상인들을 통해 고가의 의상과 고풍스러운 소품들을 집안으로 사들였다. 자신의 자존심을 달래 가며 정서적 허기를 채워가고 있었을 것이다.
부분도에 나타난 그의 눈과 표정을 <깃털이 달린 벨벳 모자를 쓴 자화상> 속 얼굴과 함께 감상해 보자. <지팡이를 든 자화상>은 그의 생애 전반에 걸쳐 바뀌어가는 개인 상황, 감정, 정서를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다. 마치 자화상이 화가 영혼의 거울 또는 솔직한 셀카인 것처럼.
<모자와 두 개의 목걸이를 찬 자화상(Self-portrait Wearing a Hat and Two Chains)>을 보자. 짧은 콧수염의 한 남자가 넓은 모자를 쓰고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모피 상의 위에 두 줄의 목걸이를 걸치고 있는 30대 중반의 이 남자는 화가 자신이다. 인상은 온화해 보이지만 옷 차림세와 자세 그리고 움켜쥔 오른손에서 당당함이 느껴진다.
렘브란트가 파산을 당했을 때, 그가 수집했던 고가의 골동품 등 예술 컬렉션들은 모두 경매에 부쳐졌다. 그의 수집품들은 당시 화가가 살았던 암스테르담 집, <렘브란트 하우스 박물관(Rembrandt House Museum)>에 전시되어있다. 그의 예술혼과 수집벽이 남긴 소장품들은 예술 애호가들이 찾아가 관람하는 세계인의 문화유산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