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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환 Oct 24. 2021

가족의 생계를 위해

- <자신을 저울질하기> # 2

에그베르트 반 데어 포엘, <1654년 델프트 폭발(1654 Delftse donderslag)>, 1654 / 베르메르,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 1665

요하네스 베르메르(Johannes Vermeer)는 1632년 네덜란드 델프트(Delft)에서 태어나 평생 그곳에서 살았다. 그리고 1675년, 43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그의 짧은 생애에는 다양한 의문, 불확실 사건 그리고 그럴듯한 추측들이 뒤덮여 있다. 마치 그의 1665년 작품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Girl With A Pearl Earring)> 속 모델이 화가의 하녀다, 애인이다 또는 애초부터 실존 인물이 아니다 등 갖가지 떠다니는 소문들처럼...

베르메르(아마도?), <Portrait of an Artist in His Studio>, 연도미상 / 베르메르(아마도?), <조달자(Procurress)>, 부분도, 1656

당시 베르메르는 작품 수도 적었고 무명 화가에 가까웠기에 남겨진 기록이 거의 없다. 그가 어디에서 누구에게 그림을 배웠는지도 알려진 것이 없다. 베르메르가 1653년 유복한 집 딸인 카타리나 볼너스(Catharina Bolnes)와 결혼해, 15명의 아이를 낳은 가난한 가장이었다는 이야기 등이 전해져 오고 있다. 

당시 대부분의 네덜란드 화가들이 그랬듯, 그도 부업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베르메르는 대가족의 부양을 위해 화상(畵商)을 활동했다. 그리고 화가로써 틈틈이 1년에 두어 점 정도의 그림을 그렸다. 

요하네스 베르메르,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화가(Painter in his Studio)>, 부분도, 1666~1668 /  동일 작품 중 소녀 부분도

그의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화가(Painter in his Studio)>를 감상해 보자. 프랑스의 미술 사학자, 장 루이 보두아예(Jean-Louis Vaudoyer)는 베르메르 작품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화가>에서 푸른 옷을 입고 있는 어린 소녀가 '베르메르의 딸'이라고 주장했다. 등을 보이고 이젤 앞에 앉아있는 화가는 베르메르 자신이다. 형편이 어려웠던 베르메르는 임금을 주지 않고 여러 날 쓸 수 있는 그림 모델을 구하려고 애썼다. 그러다 보니 모델은 결국, 가족 중 한 사람이 되곤 했었다. 

요하네스 베르메르(Johannes Vermeer), <저울질하는 여인(Woman Holding A Balance)>, 1665.

베르메르의 <저울질하는 여인>을 1편에서는 성화(聖畫)를 보듯, 종교적 관점에서 감상했다. 지금부터는 종교적 맥락을 떠나, 당시 네덜란드에 사는 평범한 가정주부의 일상을 보듯 감상해보자. 그는 왼쪽 방향의 창문과 그 빛을 자주 작품에 묘사했다. 베르메르는 창문 빛이 비친 사물들의 형상과 색 그리고 그림자들을 잘 관찰해, 작품에 의미 있는 도상들로 재탄생시켰다.

흰 모자를 쓰고 임신한 배를 드러내고 있는 이 여자 모델은 화가 베르메르의 아내 '카타리나 베르메르(Catharina Vermeer)'로 알려져 있다. 카타리나가 이 작품의 모델이 되었을 때는 32세로 추정된다. 

요하네스 베르메르, <저울질하는 여인>, 부분도, 1665 /  요하네스 베르메르,  <우유를 따르는 여인(Milkmaid)>, 1657 ~ 1658

성모 마리아를 연상시키는 그녀 머리의 흰색 천은 네덜란드 고유의 전통 의상인 더치 모자(Dutch hat)의 일종이다. 기독교 국가였던 네덜란드의 여성들이 머리카락을 가려야 했기에 생겨난 전통 장신구다. 

베르메르 작품 <우유를 따르는 여인(Milkmaid)>에서도 볼 수 있는 더치 모자. 당시 여성들은 이 모자를 옷 입기 전후에 장식한 머리를 보호하기 위한 용도로도 사용했다.

베르메르, <자화상(Self-Portrait)>, 부분도, C. 1645  / 요하네스 베르메르,  <우유를 따르는 여인(Milkmaid)>, 부분도, 1657 ~ 1658

카타리나는 남편보다 한 살 연상이다. 뛰어난 미인은 아니지만, 베르메르의 모델 중 가장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그녀는 로마 가톨릭 집안 출신이었고, 두 부부는 모두 15명의 아이를 낳았다. 4~5명의 자녀를 출산했던 당시 네덜란드 평균 출산 치를 훨씬 넘는 숫자다. 

아내 카타리나는 젊은 시절의 대부분을 임신 기간으로 보냈을 것이다. 

베르메르, <열린 창에서 편지 읽는 소녀(Girl reading a Letter at an Open Window)>, c. 1657~1659, 오일 페인팅

베르메르는 많은 식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다른 화가의 그림을 감정하고 매매하는 그림 중개상(Art dealer) 일과 부친에게 물려받은 여관을 운영해야 했다. 그는 틈틈이 작품을 그려야 했고 작업 속도가 느려 많은 작품을 남기지는 못했다. 그러나 아내 카타리나를 모델로 삼아 그린 작품은 12점 정도나 된다. 그의 1657년 경 작품 <열린 창에서 편지 읽는 소녀(Girl reading a Letter at an Open Window)>를 감상해 보자. 화가는 창문이 열린 창가 앞에서 편지를 읽고 있는 젊은 네덜란드 금발 여인의 옆모습을 차분한 톤으로 묘사했다.

베르메르, <편지를 읽는 푸른 옷의 여인>, 부분도, 1663 / 베르메르, <진주목걸이를 한 여자>, 부분도, 1664 / 베르메르, <저울질하는 여인>, 부분도, 1665

베르메르의 1663년 유화 <편지를 읽는 푸른 옷의 여인>을 감상해 보자. 그가 앞서 그렸던 <열린 창에서 편지 읽는 소녀(Girl reading a Letter at an Open Window)>와 같이 놓고 볼 때, 주제와 구성이 유사해 보인다. 푸른색 옷을 입은 여성이 거실에서 편지 읽기에 몰두하고 있다. 그녀는 착용감이 느슨해 보이는 의복을 입고 가슴 아래 부분은 아이를 밴듯한 체형을 하고 있다. 하지만 등장인물의 의상과 둥근 몸매는 단순히 그 시대의 유행일 수도 있다. 

그의 1664년 작품 <진주 목걸이를 한 여인(Woman with a Pearl Necklace)>에서도 주인공의 헐렁한 상의와 불룩한 배가 눈에 띈다. 화가의 아내는 평생 15명의 자녀를 출산했다. 베르메르의 작품 가운데 부인이 등장하는 그림이 약 12점, 카타리나가 임신할 때마다 그녀의 초상화를 한 점씩 그린 셈이다. 한편 그녀가 출산한 자녀 가운데 4명은 안타깝게도 유아기에 사망했다.

베르메르, <열린 창에서 편지 읽는 소녀>, 부분도, 1657~59 / 베르메르, <편지 읽는 푸른 옷의 여성>, 부분도, 1662~65

베르메르의 작품에 화가의 아내 카타리나가 자주 등장하는데 그 이유는 그의 가정 형편으로 추측된다. 임금을 지급하지 않고, 긴 시간 동안 모델로 세우기에 가장 편리한 인력 중 하나는 가족이다. 그러다 보니 베르메르의 작품에서는 네덜란드의 평범한 주부의 모습을 한 화가의 아내가 자주 등장하는 편이다. 

그의 <열린 창에서 편지 읽는 소녀> 부분도와 <편지 읽는 푸른 옷의 여성>의 부분도를 나란히 감상해 보자. 같은 높이의 이마, 넓은 눈, 곧은 코가 특징인 위의 두 모델은 동일 인물로 보이며 카타리나 베르메르로 추정하고 있다.

베르메르, <편지를 들고 있는 여종과 함께 있는 여인(Lady with Her Maidservant Holding a Letter)>, 1667(우)

<저울질하는 여인>에서도 주인공 카타리나는 역시 풍성한 상의를 입고 있다. 네덜란드에서는 잭(jack)이라 불렸던 이 우아한 재킷(jacket)은 일반적으로 중산층 또는 상류층 여성들이 즐겨 입었던 의상 가운데 하나다. 옷 속에 모피가 부착되어 있어 보온력이 뛰어났던 이 재킷은 당시 네덜란드 여성들을 긴 겨울 추위로부터 지켜주었다. 또한 착용감이 좋아, 집안일을 하는 여성들의 움직임을 자유롭게 했다. 

요하네스 베르메르(Johannes Vermeer), <저울질하는 여인(Woman Holding A Balance)>,  부분도, 1665.

벌어진 흰 재킷의 흰 털 사이로 여인의 배가 볼록 드러났다. 베르메르가 눈에 잘 띄게 묘사한 붉은색 의상은 만삭의 배를 강조하기 위함인 듯싶다. 탁자 위의 빛나는 보석들은 그녀가 집 안 깊숙한 곳에 간직해 두었던 귀중품들로 보인다. 반짝이는 이 금은보화들은 인간들의 물질적 욕심, 삶의 무상함을 상징하는 도상이기도 하다.

요하네스 베르메르(Johannes Vermeer), <저울질하는 여인(Woman Holding A Balance)>,  부분도, 1665.

세월이 갈수록 11명의 자녀를은 점점 성장하는데, 집안의 재산과 화가 남편의 수입은 점점 줄어만 가고 있었다. 그녀는 새로 임신한 아이의 출산을 앞두고, 무거운 마음으로 저울함에서 저울을 꺼냈다. 이제 장롱의 보석과 금화를 처분해야 할 다급한 상황에 처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에서 베르메르의 아내와 그림 수집상인의 모습 / 판 라위번이 소유한 베르메르의 유화 <델프트 전망(View of Delft)>, c. 1661

한편 베르메르는 돈벌이가 시원치 않자, 동네 식료품 가게 주인에게 돈을 빌리거나 자신의 작품을 담보로 잡힌 빵과 우유를 외상으로 가져다 먹었다. 그 식료품 가게 주인은 그림 수집가이자, 미술 중개상으로 활동하는 판 라위번(Pieter van Ruijven)이었다. 

베르메르의 후원자이기도 했던 판 라위번은 일찌감치 그의 천재성과 그림의 가치를 알아챈 그림 수집상인이었다. 가난한 천재 화가의 작품을 탐욕적으로 사들인 그는 베르메르의 전체 작품 중 절반 이상을 사모았다. 1661년 유화 <델프트 전망(View of Delft)>도 판 라위번이 소유했던 베르메르의 작품 중 하나다. 쉬에(Schie) 수로가 흐르는 아름다운 도시 '델프트'는 그가 태어나서 결혼하고 많은 자녀와 함께 평생을 살았던 곳이다.

판 라위번이 베르메르에게 임대한 200 길더 관련 서류, 1657 / 베르메르,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화가(Painter in his Studio)>,  1666~68

재정난이 더욱 악화되자 더 이상 버티지 못했던 베르메르는 은행에서 대출까지 받았다. 녹록지 않은 빚을 지고 세상을 떠난 대가족의 가장 베르메르. 그가 죽은 후, 화가의 아내는 채권자들을 위해 작품 등 상속 재산을 포기해야 했다. 

하지만 카타리나는 남편의 작품 가운데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화가(Painter in his Studio)> 만큼은 끝까지 지켜냈다. 베르메르가 평생 가장 아꼈던 이 작품 속에는 사랑하는 딸과 죽은 남편의 모습이 들어있기 때문이었다.

요하네스 베르메르(Johannes Vermeer), <저울질하는 여인(Woman Holding A Balance)>,  부분도, 1665.

저울의 접시(pans of the balance) 위에는 아무런 귀중품도 보이질 않는다. 여인은 보석들을 달기 전, 접시를 비우고 저울대의 균형 상태를 점검하고 있는 중이다. 가족의 생계를 지켜내기 위해, 집안의 귀중품을 꺼내 팔아야 했던 여인은 빈 저울을 들고 깊은 생각에 잠겨있다.

베르메르, <저울질하는 여인>,  부분도, 1665 /  베르메르,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화가(Painter in his Studio)>, 부분도, 1666~68

부와 검소, 현실과 미래 그 사이에서 균형 잡힌 삶을 추구했던 17세기 네덜란드 한 가정에 부인의 행실을 베르메르는 차분한 톤으로 깊이 있게 그려냈다. 그러나 정작 베르메르는 '가장의 책임과 예술가의 재능'이란 저울 앞에서 균형을 잡지 못했다. 

1675년에 화가 베르메르는 43세 젊은 나이에 심장 마비로 사망했다. 그는 가난 속에서 많은 자녀와 아내를 부양해야 했다. 그에 따른 부담감은 우울증과 그의 심장을 압박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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