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스승과 제자의 콜라보레이션 > # 2
세례 요한은 30세가 되던 해부터 요르단 강가에 머물며 강에 오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요르단강에 예수가 나타나자 그를 알아본 세례 요한은 예수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다고 한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고 물 밖으로 나오자, 하늘이 열렸다. 예수는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처럼 자신에게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 마태복음 3장
대부분의 화가들은 그리스도의 세례 장면을 그릴 때, 하늘에 비둘기와 신비로운 광선을 그렸다. 그리고 요르단 강가 주변에 여러 무리들의 사람을 등장시켰다. 또한 예수 좌우에는 시중드는 날개 달린 천사 서너 명과 한 무리의 인물들을 배치시키는 편이다.
그러나 베로키오는 주변 인물을 단출하고 작은 크기로 등장시켜 '세례 받는 그리스도'에 더 시선이 가도록 구성했다. 강어귀 예수 옆에는 천사를 두 명만 배치했고, 특이하게도 천사의 상징인 커다란 날개를 제거했다. 대신에 화가는 천사들 머리 위에 인간과 구별된 매우 뚜렷한 황금 후광(halo)을 올려붙여 그들의 정체성과 권위를 세워주었다.
왼쪽 천사는 세례 받은 후 강물 밖으로 나올 예수를 위해 그의 겉옷 또는 수건을 들고 대기하며 세례식에 집중하고 있다. 이에 비해 그 옆 천사는 두 손을 모은 체, 시선은 세례식 반대편 허공을 향하고 있다.
레오나르도가 그렸다고 전해지는 왼쪽 천사의 머릿결은 하나하나가 세밀하게 그려져 있다. 또한 오른쪽 베로키오가 그린 천사에 비해 레오나르도의 천사는 부드러운 선과 점진적인 색상 변화를 보이며, 보다 더 아름다우면서도 친밀한 느낌으로 다가오고 있다.
오른쪽 천사의 신체는 편안하게 정면을 향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레오나르도가 그린 왼쪽 천사는 그리기가 매우 까다로운 방향과 자세를 취하고 있다.
레오나르도의 천사는 무릎을 꿇고 뒤돌아선 자세에서 등을 감상자 방향으로 3분의 2 가량 튼 각도로 포즈를 취하고 있으며 시선은 세례식 쪽을 향하고 있다.
왼쪽 천사는 무릎을 꿇은 매우 불편한 자세로 자신의 신체에 S자 선을 만들고 있다. 레오나르도는 그 S 라인이 만든 실루엣을 따라, 천사의 푸른 망토에 그늘과 그림자를 섬세하게 새겨 넣었다.
베로키오의 조각처럼 딱딱하고 무거운 느낌의 화폭에 레오나르도의 손길이 닿자, 인물들은 동적 부피감과 운동감을 갖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스승이 그린 천사에 비해 생동감이 넘칠 뿐만 아니라 더 정감이 느껴지는 천사가 탄생한 것이다.
"그의 섬세함과 강렬한 감정 묘사로 미루어 보아, 유화 물감으로 덧칠한 배경 외에도 천사의 윤관,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왼쪽의 풍경 부분은 레오나르도의 솜씨일 것으로 추정된다."
- <우피치 미술관>의 저자, 미술사가 엘레나 지난네스키.
세례 요한이 자신보다 나이 어린 예수에게 세례를 주었지만, 예수를 뛰어넘을 수는 없었다. 스승 베로키오도 제자 레오나르도에게 그림을 가르쳐 주었지만, 레오나르도의 탁월한 회화 재능을 능가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일까, 베로키오는 세례 요한을 그렸고, 레오나르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렸나 보다.
레오나르도의 출생지인 이탈리아 북부 토스카나(Toscana) 풍경은 <모나리자> 등 그의 회화 속 배경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이때 레오나르도는 당시 르네상스 화가들이 즐겨 썼던 단선적 원근법을 거부하고 자신이 개발한 투시법으로 뒤쪽 경치를 묘사했다.
배경의 경계선을 흐릿하게 하고 밝은 색을 씀으로써 뒤쪽 경치가 후방으로 물러나는 듯한 시각적 효과를 내는 스푸마토(Sfumato). 레오나르도는 그림 배경은 물론 인물 묘사에도 이 기법을 적용했다.
미술 연구가들은 스푸마토로 그려진 먼 경치(遠景) 일부 도상과 왼쪽 천사에 표현된 유화 기법 등을 근거로 <그리스도의 세례>를 베로키오와 레오나르도의 합작품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템페라(Tempera)로 그려진 스승의 작품 도상 일부를 유화 물감(oil painting)으로 수정한 것이 전문가들의 연구에 의해 밝혀지기도 했다.
그림 윤곽에 안개와 같은 흐릿한 느낌을 주는 스푸마토 명암법. 이 기법으로 모나리자(Mona Lisa)의 초상화에 깊이감과 신비감을 불어넣었던 레오나르도 다빈치. <그리스도의 세례>의 일부 배경에서 스푸마토 기법의 붓 터치가 어렴풋이 감지되고 있다.
예수가 요단강에 맨발로 서서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세례를 받고 있다. 그의 세례식은 공생애(公生涯, Public Life)의 시작을 의미한다. 세례자 요한이 수반에 담긴 세례수(Baptism water)를 예수에게 붓고 있는 동안 그는 겸손하게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드리고 있다.
베로키오의 <세례 받는 그리스도>와 서로 비슷한 시기에 같은 피렌체에서 그려진 기를란다요(Domenico Ghirlandaio, 1449∼1494)의 <세례 받는 그리스도(Baptism of Christ)>를 감상해 보자. 성화 속 예수는 밝은 색 피부에 금발의 긴 헤어스타일과 멋진 턱수염을 기른 잘생긴 청년으로 묘사되어 등장하는 경우가 많은 편이다.
기를란다요의 1473년 프레스코화(fresco) <그리스도의 세례(Baptism of Christ)>를 보자. 이 작품에서도 준수한 외모의 예수가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베로키오의 <세례 받는 그리스도> 속 예수 도상은 잘생긴 외모와는 거리가 먼 모습이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인간의 몸으로 태어난 신의 아들이자, 살아있는 유일신 그 자체인 예수 그리스도. 그러나 그의 얼굴과 신체는 너무 늙고 초라해 보여 서른 살의 청년으로 보기 힘들 정도다.
각각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그리스도의 세례>과 베로키오의 <세례 받는 그리스도>에 묘사된 예수의 얼굴을 나란히 감상해 보자. 베로키오는 예수를 덥수룩한 머리카락, 눈가의 주름, 야위고 힘없어 보이는 체격으로 묘사했다. 한마디로 신의 아들 예수를 볼품없이 그렸다. 이유는 무엇일까? 화가가 구약 성경의 이사야서(Isaiah) 본문을 충실하게 따라 그렸기 때문일 거라는 주장이 가장 설득력 있어 보인다.
"그에게는 아름다운 모양도 없고 위엄 있는 풍채고 없어서, 우리가 보기에 아무 볼품이 없으니, 도대체 우리를 잡아끌 만한 훌륭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 이사야 53장 2절
성경에서는 ‘눈길을 끌 만한 위엄’이 없다고 했지만, 베로키오 작품 속 예수의 하체는 눈길을 끌기에 충분해 보인다. 베로키오는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하체 천 사이로 성자의 체모를 노출시켰다. 이 같은 노골적인 장면 때문에 예수 바로 옆 천사가 일부러 고개를 돌렸다는 오해가 생길 정도다.
또한 예수의 허리에 둘려진 천 조각은 화려하고 독특한 줄무늬 수건이다. 베로키오는 예수에게 파격적인 의상을 입혀 감상자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세례 요한이 진지하고 엄숙하게 진행하는 세례식 장면을 베로키오는 근접 촬영 구도로 묘사했다. 세례수를 뿌리고 있는 세례자의 손과 팔에서 느껴지는 긴장감까지 생생하게 잘 담아냈다. 그러나 이들의 의상은 기원전 1세기말 팔레스타인 지방의 의상 문화와는 걸맞지 않아 보인다.
더욱이 세례 요한의 빛나는 황금빛 겉옷, 예수의 요란한 컬러 줄무늬 속옷은 성스러워야 할 세례식 분위기와는 너무 거리감이 있다.
중세 유럽의 주요 산업 중 하나는 섬유 제조업이었다. 베로키오 <세례 받는 그리스도>의 등장인물들의 복장에 대해 미술 연구가들은 당시 피렌체 특산품인 인기 수출 직물이거나 유럽의 최신 유행 의상이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기를란다요의 <그리스도의 세례(Baptism of Christ)>를 보면, 예수는 흰색의 단순하고 검소한 수건을 허리에 두르고 등장한다. 기를란다요는 흰 색상의 허리 수건에 죄 없는 흰 어린양·순결·순종 등의 의미를 담으려 했을 것이다.
세례 받는 종교 지도자 예수에게 과하다 싶게 화려한 줄무늬 허리 수건을 입힌 화가 베로키오의 회화적 도전과 용기는 단연 돋보인다. 또한 최신 옷감을 착용한 예수 그리스도와 세례 요한을 수용한 피렌체 시민의 패션 감각과 의류 상인들의 상술도 놀랍기만 하다.
한편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자화상이라고 전해지고 있는 왼쪽의 긴 고수머리 천사 얼굴 도상. 맑고 순수하게 빛나는 그의 눈은 지금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 걸까?
아름다움도 위엄도 없는 신의 아들 예수일까,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고 인정해준 세례 요한의 옷을 입고 있는 스승 베로키오일까?
<세례 받는 그리스도>는 피렌체의 산 살비 수도원이 우피치 미술관에 기증한 것으로, 현재 남아있는 베로키오의 유일한 회화작품이다. 나무 위에 유화(oil painting)로 제작되었지만 작품의 보존 상태가 양호한 스승 베로키오와 제자 레오나르도의 합작품 <세례 받는 그리스도>.
이외에도 베로키오는 당대에 많은 걸작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걸작은 그의 제자들일 것이다.
베로키오는 자신의 공방에서 작업하던 화공들을 단순한 기술자나 조수가 아닌, 재능과 개성을 가진 예술가로서 대했다. <세례 받는 그리스도>를 통해 감상자들은 자신보다 더 기량이 뛰어난 어린 제자에게 붓을 넘겨준 스승의 너그럽고 속 깊은 마음을 보았다. 이런 아량과 뱃심 있는 베로키오의 무릎 아래에서 훗날 르네상스 3대 거장이 나왔다.
"스승은 그의 제자로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