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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환 Oct 24. 2021

팜므파탈의 미소

- < 발랄한 여인의 초상화 > # 3


마담 레카미에는 그녀의 이전 초상화보다 더 자신의 젊음과 매력을 부각해줄 초상화를 원했고 필요하다면 과감한 노출과 관능적인 포즈를 취할 의향이 있었다. 

Jacques Louis Dubois , <여신 헤베(Hebe)>(좌) /  다비드, <마담 레카미에>, 1800 (중) /  다비드, <자화상>, 1824(우)

이 같은 레카미에의 욕망을 눈치챈 프랑수와 제라르는 자신의 스승인 자크 루이 다비드의 1800년 작품 <마담 레카미에>에다 입혔던 고대 그리스 신화 속 여신의 경건하고 엄숙한 기운들을 걷어 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무거운 여신의 에너지 대신, 관능을 불러일으키는 육감적 에너지들로 그녀의 초상화에 하나하나 경쾌하게 채워 나갔다.

프랑수아 제라르(Francois Gérard), <줄리엣 레카미에의 초상화를 위한 연구>, 분필(chalk) / 제라르, <레카미에 부인의 초상>

의자에 기대듯 앉아 있는 그녀는 고대 그리스풍의 흰색 '슈미즈 가운(Chemise Gown)'을 입고 있다. 소재가 얇고 부드러워 여인들이 맨살에 그대로 입는 스타일이다. 얇아도 비치지 않는 소재의 옷감이지만 착용하면 신체의 윤곽이 자연스럽게 드러나, 나이트가운(Night gown)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가운은 퍼프 슬리브(Puff Sleeve), 즉  '뽕 소매'가 없는 스타일이다. 대신 어깨 끈에 부드럽고 풍성한 주름이 잡혀있어, 어리고 귀여운 멋을 풍겨주는 디자인이 특징이다. 

프랑수아 제라르(Francois Gérard), <레카미에 부인의 초상(Portrait de Juliette Récamier)>, 세부도, 1802.

좀 더 젊어 보이고 싶어 했던 그녀의 요청을 떠올리며, 화가 제라르는 얼굴의 피부 톤은 물론, 옷감의 주름 하나하나에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 그리고 음영(陰影)을 정교하게 새겨 넣었다. 

레카미에의 왼쪽 어깨 끈이 벗겨져 흘러내리고 있다. 흰 어깨와 윗 가슴이 자연스럽게 노출되면서 그녀의 상체는 도발적 분위기를 취하고 있다.

프랑수아 제라르(Francois Gérard), <레카미에 부인의 초상(Portrait de Juliette Récamier)>, 세부도

레카미에의 남성을 호릴 듯 아름다운 눈빛이 붉은 입술과 양 어깨를 타고 내려와, 우아하게 늘어뜨린 양 팔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매혹의 전류는 양손의 교태 어린 손가락 도상에서 절정을 이루고 있다. 

프랑수아 제라르(Francois Gérard), <레카미에 부인의 초상(Portrait de Juliette Récamier)>, 세부도.

손(hand)은 화가들도 가장 그리기 어려워하는 신체 부위 가운데 하나다. 인간(성인)의 뼈는 모두 206개다. 그중 54개의 뼈가 손에 집중되어있다. 

그만큼 작은 뼈들로 복잡하게 구성된 부위다 보니, 손 모양새를 자연스럽게 또는 아름답게 그리기란 쉽지 않다.  

다비드, <마담 레카미에 (Madame Récamier)>, 세부도, 1800 /프랑수아 제라르, <레카미에 부인의 초상>, 세부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은 인간의 심장처럼 감정과 행동이 분출되는 곳이기에, 화가들은 손 도상을 통해 주인공 또는 화가 자신의 심리와 욕망을 담아 표현하려 애쓴다.


다비드와 제라르가 그린 마담 레카미에의 확대된 오른손을 관찰해 보자. 다비드가 그린 레카미에의 손은 정지된 또는 닫혀있는 공간 같은 느낌이다. 반면에 제라르가 그린 그녀의 손은 누군가를 조용히 부르고 있는 열린 공간처럼 다가온다.  

프랑수아 제라르, <레카미에 부인의 초상>, 세부도, 1802 / 프랑수아 제라르, <큐피드와 프쉬케(Cupid and Psyche)>, 1798

고풍스러운 장식과 풍성한 쿠션감이 느껴지는 짙은 회색 의자에 오른쪽 어깨를 가볍게 기대고 있는 그녀. 경쾌하게 비튼 허리 아래 엉덩이를 의자에 살짝 걸친 채, 감상자에게 뜨거운 눈빛을 보내고 있다.


란제리(lingerie)처럼 보이는 그녀의 얇은 흰색 슈미즈 가운을 오렌지색 숄(shawl)이 둘러싸고 있다. 오렌지 색상은 그녀의 미소와 함께 감상자들에게 따뜻함과 행복함을 전해주고 있다. 

특히 하체를 가리고 있는 말려진 오렌지색 또는 레몬 빛(lemon yellow) 숄 도상은, 호기심, 즐거움의 감흥을 일깨워 주는 듯하다. 동시에 제라르의 1798년 작품 <큐피드와 프시케(Cupid and Psyche)>를 연상시켜준다. 

프랑수아 제라르, <레카미에 부인의 초상>, 세부도, 1802(좌) /  프랑수아 제라르, <큐피드와 프쉬케(Cupid and Psyche)>, 부분도, 1798.

제라르의 <레카미에 부인의 초상> 세부도에서 레카미에의 숄이 배꼽 아래에서 말려있듯, <큐피드와 프시케>에서 여신 프시케(Psyche)의 얇은 흰 가운도 같은 위치에서 말려 내려가다가 멈춰 섰다. 


오렌지나 레몬 향을 뿜어낼 것만 같은 숄은 가라앉은 주변 공기에 상쾌한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담황색(淡黃色) 레몬 숄에서 풍기는 색감과 부피감은 경박하게 드러난 레카미에의 실루엣을 덮어주며 작품에 기품까지 더해주고 있다.

대각선이 좌에서 우측으로 지나가며 화면에 두개의 큰 삼각형이 형성된 프레임 / 대각선이 있는 '레카미에 초상화' / 좌우반전된 '레카미에 초상화'

다비드는 좌에서 우로 지나가는 대각선 구도를 만든 후, 왼쪽 삼각형 안에 인물을 배치했다. 감상자의 시선은 화면 왼쪽 상단, 레카미에의 머리에서 시작해 그녀의 목과 허리 그리고 무릎과 발로 이어진다. 


다비드가 선택한 이 화면 구성은 자연스러운 시선의 흐름을 제공하면서도 역동적이다. 만약 우측에서 좌측으로 지나가는 대각선 구도로 그렸다면 작품에서 안정감은 커졌겠지만 여인의 역동성은 약했을 것이다.

프랑수아 제라르, <레카미에 부인의 초상)>, 초크 스케치 / 프랑수아 제라르, <레카미에 부인의 초상)>, 세부도, 1802

제라르의 분필 드로잉(Chalk drawing) 작품 <줄리엣 레카미에의 초상화를 위한 연구>를 관찰하면, 그녀의 시선은 우측 하단을 향하고 있다. 발은 양쪽 모두 발 받침대 위에 올려져 있다. 초기의 분필 스케치는 완성작에 비해 덜 역동적이다.


하지만 1802년 완성작에서 그녀 시선은 정면을 향하고 있다. 오른쪽 발은 발 받침대에서 내려와 곧 일어설듯한 운동감이 느껴진다. 길게 늘어뜨린 흰 드레스 자락 아래에 그녀의 벗은 발이 발등까지만 고개를 내밀고 있다. 

다가가면 발을 빼거나 숨어버리는 종잡을 수 없는 팜므파탈(femme fatale) 레카미에의 교태를 화가가 은유적으로 묘사한 도상으로 해석된다. 

월리엄 퀄러 오차드슨 경, <마담 레카미에의 샬롱>, 유화 /

그녀의 이름 앞에 '팜므파탈' 이란 수식어를 붙이는 것은 적절할까? 월리엄 퀄러 오차드슨 경(Sir William Quiller-Orchardson)의 유화 <마담 레카미에의 샬롱(The Salon of Madame de Recamier)>를 보자. 

그녀는 나폴레옹의 왕비인 조세핀과 함께 당대의 ‘삼미신(三美神)’으로 칭송될 만큼 미모와 지성이 뛰어났다. 이로 인해 레카미에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은 물론 많은 예술가들과 친구가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들과 친밀하게 지내면서도 구혼 등 결혼 제안에 대해서는 늘 냉담했다. 

장 밥티스트 자크 아우구스틴, <Portrait of Madame Récamier>, 1801 / 장 바티스트 이사베, <아우구스투스의 초상화>, 1814, 유화

요부 같은 레카미에의 미모와 술수에 상처를 입은 수많은 남성 가운데 유명한 인물로 프로이센의 왕자 아우구스투스(Prince Augustus,1779-1843)가 자주 구설에 오른다. 


장 바티스트 이사베(Jean-Baptiste Isabey)의 유화 <아우구스투스의 초상화(portrait of Augustus)>를 보자. 프로이센의 왕족이자 장군인 아우구스투스의 35살 때의 모습이다.

르네 를롱(René Lelong), <마담 레카미에>, 1892, 벨 에포크(Belle Epoque): 19c 및 20c 장식 예술

프로이센의 바람둥이 왕자 아우구스트 역시 그녀를 보고 사랑에 빠지자, 그는 부푼 마음에 미래 설계까지 했다. 사내의 욕망을 충동질시켜놓고 살짝 한 걸음 뒤로 빼는 그녀의 태도에 휘말려버린 아우구스투스는 청혼하기 전에 개종까지 했다. 하지만 그는 레카미에로부터 '그동안 마음이 변해 결혼을 할 수 없다'는 어처구니없는 답신을 받는다.

프란츠 크루거(Franz Kruger), <프로이센의 왕자 아우구스투스(Prince Augustus of Prussia)>, c. 1817, 유화

실연의 충격으로 큰 슬픔에 빠져 지내던 그에게 초상화 한 점이 도착했다. 프랑수아 제라르가 1805년 경 그린 <레카미에 부인의 초상>이었다. 

프란츠 크루거(Franz Kruger)의 1817년 경 작품 <프로이센의 왕자 아우구스투스(Prince Augustus of Prussia)>을 감상해 보자. 그녀에 대한 그리움 때문일까. 왕자의 거실 벽에 마담 레카미에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다비드, <마담 레카미에 (Madame Récamier)>, 세부도, 1800년 / 프랑수아 제라르, <레카미에 부인의 초상>, 1802~1805

다비드의 레카미에는 발 받침대를 딛고 소파 위에 올라가 누우려다, 고개를 돌려 잠시 관객을 바라보고 있다. 그녀는 이미 안락한 소파에 기대어 누웠다. 

소파 아래로 또는 화면 밖으로 나올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 누구라도 함부로 다가오면, 왼쪽 기름 램프 기둥으로 저지할 것 같은 기세가 느껴진다.

프랑수아 제라르(Francois Gérard), <레카미에 부인의 초상(Portrait de Juliette Récamier)>, 세부도, 1802

제라르의 레카미에는 얼굴뿐만 아니라 상체도 감상자를 향하고 있다. 그녀는 왼손으로 레몬색 망토를 벗어던지고 상큼하게 일어나, 화면 밖으로 그 누군가를 향해 곧 걸어 나올 것만 같다. 


레카미에는 제라르에 의해 새롭게 핀 꽃처럼 보인다. 화가는 초상화 의뢰자의 속마음을 읽었고 그대로 그렸다. 그녀의 미소가 입가에 가득하다. 당연한 일인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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